장기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67] 8. 승승장구

등록 2014.12.19 17:39수정 2014.12.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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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양승조는 9월 24일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구치소로 이송되고 난 뒤에도 조합원들은 끈질기게 면회를 다녔다.


11월부터는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재판정에 면회를 가서도 끈질기게 싸웠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는데 감옥 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승조를 생각하면 이소선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재판할 때면 으레 형사들이 방청석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형사들과 자리 때문에 참 많이 싸웠다.

또, 풍천화섬의 회사 측 증인들이 나와서 구속자들한테 불리한 증언을 허위로 할 때는 정말 그들이 미웠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조합원들은 방청을 방해하는 경찰과 싸우다가 결국 경찰차에 실려서 노동교실까지 오게 되었다.

그해 11월 13일 태일이의 추도식 날은 유난히 추웠다. 그 추운 날에도 전태일의 추도식은 참으로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낮에는 조합 간부를 비롯, 조합원 50명 가량이 모란공원에 가서 추도식을 하고 밤에는 일을 마친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지난해에는 시간단축 투쟁을 비롯해 몇 가지 근로조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그 투쟁으로 조합원이 눈부시게 증가했기 때문에 이날 추모행사에 참가한 조합원의 숫자는 대략 600명 가량이 되었다.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노동교실의 3층과 4층이 복도까지 빽빽이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2층에 있는 '청계시장상가 근로자복지의원'까지 빌려서 행사를 치를 정도였다. 이날 조합원들은 추모행사를 마치고 나서 '구속자석방'과 '근로조건 개선'등을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거리시위를 하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노동교실 밖으로는 진출하지는 못했다.


'태일이를 살려 주십시오' 호소문 발표

이날 이소선은 청계노조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인사들한테 '태일이를 살려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11월 13일은 태일이가 근로자의 권익쟁취와 근로조건의 개선 그리고 모든 억눌린 사람의 인간다운 생활을 부르짖으며, 스스로 제 몸을 불태운 지 만 6년이 되는 날입니다.

평화시장 근로자 여러분, 전국의 근로자 및 노동운동가 여러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근로자의 단결된 투쟁을 호소한 이날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살길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행동으로 우리의 살길을, 빼앗긴 권리를 쟁취해야 할 날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6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근로자의 보다 나은 생활이나 근로조건의 개선은커녕, 우리의 고통은 더욱 더 심해지고 전태일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강요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의와 진리가 배신당하고 폭력과 기만이 활개를 치려드는 암담한 현실은 태일이를 더욱 생각나게 하고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의를 더욱 다지게 합니다. 더욱이 태일이의 뜻을 이어받아 근로조건의 개선과 권익옹호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양승조 군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며 거기에다 우리 시장 근로자의 죽음을 각오한 철야단식 농성으로 양부장의 석방을 보장받고도 그것이 한 낱 기만에 불과했구나 생각할 때 더욱 분해집니다.

또한 우리 근로자를 위해 힘쓰다가 구속된 분들이 이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근로자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끈질기게 투쟁해왔고 또 계속적으로 승리해 왔습니다. 우리가 뭉쳐 싸울 때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습니다. 나는 근로자 여러분의 확고한 권리의식과 강렬한 투쟁정신에서 태일이의 부활을 보고 싶습니다. 태일이를 살립시다. 태일이를 살려주십시오!

양승조는 결국 해를 넘겨 1977년 2월 8일 20만 원의 보석금으로 구속된 지 5개월 가까이 되어서 석방되었다. 양승조가 나오는 날 노조에서는 석방을 기념하는 페넌트를 만들어 조합원들한테 나누어 주었는데 이 페넌트의 색깔이 빨간색이라는 이유로 중부경찰서 정보과에서는 빨갱이라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장기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1977년 봄은 날로 높아져가는 반유신·박정권 퇴진투쟁으로 말미암아 긴장이 고조되었다.

지난해 '3·1 구국선언'을 기점으로 각 대학에서도 구국선언을 하면서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박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다. 이번 3·1절을 기해서 학생, 재야인사,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반정부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두에서도 유신을 비난하고 박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각 대학의 개학을 앞두고 정보기관에서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이는 데 혈안이 되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그 유인물을 작성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수배자들을 찾는 공작을 펼쳤다.

이 같은 정세에서 3·1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이소선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장기표가 종암동의 어느 다방에서 잡혔다는 것이었다. 장기표는 그동안 이소선과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만나고 있었다. 이소선 뿐만 아니라 청계피복 조합원들 몇 명도 남 몰래 만나게 해주었었다.

그 중에서도 민종덕과 전태삼 그리고 청계피복 조합원은 아니지만 노동운동을 헌신적으로 하는 박문담 등이 장기표를 지속적으로 만나 왔었다. 이소선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만나게 해주었는데 이들은 어떤 때는 함께 만나기도 했었는가보다. 이날도 장기표는 우리를 만나기로 했는데, 중앙정보부 요원들한테 약속장소였던 다방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장기표가 잡혔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약속시간보다 늦게 다방에 도착한 전태삼이 다방에 들어가려고 하다, 정보요원들이 민종덕과 장기표, 박문담을 다방에서 끌어내어 차에다 싣는 것을 보고 곧바로 도망와서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장기표는 그동안 평화시장 제품공장에서 약 1년가량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도피생활을 하는 조영래의 도움으로 결혼(물론 비밀결혼)을 해서 월곡동의 시영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봄의 반정부 투쟁을 앞두고 분주하게 일을 꾸미고 다니다가 그만 덜컥 잡혀버렸다. 이소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잡혀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형을 받을 것인가! 온갖 걱정이 다 되었다. 물론 민청학련 사건 당시에 잡혔으면 틀림없이 사형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때를 피했으니 지금은 극형이나 중형은 내릴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지, 단 몇 년이라도 감옥살이를 한다면, 감옥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고생스러울 것이며, 또 밖에서 계획했던 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럴 수록 이소선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이 더욱더 솟구쳐 올랐다.
덧붙이는 글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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