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행 배를 탑승한 제물포항. 인천시 중구 선린동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러면, 갑신정변이 고작 3일 만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실패한 최대 원인은 이 정변의 두 주역인 고종과 김옥균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제1부에서 설명한 것처럼,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고종과의 공동 작품이었다. 정변이 개시된 직후만 해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잘 이루어졌다. 만약 이런 관계가 지속됐다면, 갑신정변은 '성공한 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인 김옥균과 주군인 고종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고종이 등을 돌렸고, 이 때문에 김옥균이 정부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됐다. 이것이 갑신정변의 최대 실패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김옥균에게 등을 돌렸을까?
김옥균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노장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목적으로 집중 육성한 청년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런 배경 하에 부각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옥균은 고종의 뜻을 잘 따라주었다. 1884년 세계 톱뉴스인 조선·러시아 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고종의 밀명을 받은 김옥균이 영국·프랑스·독일·미국·청나라·일본을 감쪽같이 속인 상태에서 러시아와의 수교를 성사 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옥균은 고종이 보기에 참으로 믿음직한 참모였다.
그래서 고종은 자신의 신임을 표시하는 밀서를 써주고 자금 지원을 하는 방법 등으로 김옥균의 거사 준비를 도왔다. 그런데 정변이 터지자마자 고종은 김옥균이란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평소에 생각했던 그 김옥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소 임금 앞에서 충직하게 보였던 그 김옥균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은 구세력에 대한 인적 청산에 곧바로 착수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반대파를 눈에 띄는 대로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중에는 내시 유재현처럼 고종이 아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옥균은 반대파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정변 이틀째 기록인 고종 21년 10월 18일자(양력 1884년 12월 5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고종이 "저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고 연거푸 외치는데도 김옥균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을 죽였다. 이때 고종의 주변에 김옥균의 행동대원들이 포진했기 때문에 고종의 말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믿었던 김옥균이 자기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면서 고종의 가슴은 어딘가 써늘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고종은 김옥균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이지 말라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 것까지는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다. 고종은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평소 자기와 친했다고 해도 그들을 살려두면 정변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종 자신이 죽는 게 아니었다.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는 김옥균을 보고 가슴이 좀 썰렁하기는 했지만, 아직 김옥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릴 단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변 3일째 되던 날에 김옥균이 혁명공약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고종은 김옥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뭐 저런 놈이 다 있나"라며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은 김옥균이 자신과의 사전 합의 없이 혁명공약을 작성한 것도 괘씸했지만, 자신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거기에 담았다는 것이 가슴 떨리도록 괘씸했다. 혁명공약 제1조는 청나라에 연금되어 있는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모셔온다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인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왕이 되고도 10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허수아비로 지냈던 고종은 1873년에 명성황후와 민씨 집안을 앞세워 아버지를 실각 시켰을 뿐만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청나라군이 아버지를 중국 톈진으로 끌고 가는 것도 묵인했다.
또 고종의 국정 방침은 기본적으로 흥선대원군과 정반대였다. 흥선대원군은 시장개방을 막고 외세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던 데 반해, 고종은 시장을 개방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 상호간의 경쟁을 유발하고자 했다. 그리고 고종은 아버지 시대의 노장 관료들을 축출할 목적으로 김옥균 같은 청년 관료들을 집중 육성했다.
그래서 고종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으로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그런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국내로 모셔오겠다고 발표했으니, 고종은 '저 놈은 내 사람이 아니구나. 저 놈은 내 참모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돌변한 고종...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