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만나는 게이들, 여긴 뭐가 다른 거야

[팔팔한 팔라완 기행 19] 게이도 행복한 나라

등록 2015.03.12 11:18수정 2015.03.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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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짧게 커트한 게이 미용사 마무 ⓒ 강은경


'필리핀엔 게이가 왜 이렇게 많지?'

필리핀에서 누구나 한 번쯤 갖는 의구심일 게다. 팔라완 배낭여행 27일째, 그동안 나는 매일 한두 명의 바끌라(게이)를 만났다. 숙소 직원, 관광안내소 직원, 상인, 박물관 가이드... 예술감각과 유머감각이 뛰어난 그 사람들을.


그리고 오늘, 나는 게이 미용사에게 머리를 깎았다. 타이 타이(Tay Tay) 시내를 배회하다 들어선 작은 미용실. 뜨거운 양철지붕처럼 달궈진 거리를 배회하다, 눈에 띄여 들어왔다. '아, 덥다 더워! 머리나 시원하게 쳐버리자'라고 생각했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멋지다아~! 예술이야, 예술~!"

마무 혼자서 신 났다. 콧소리 흥흥 날리며 '예술'을 외쳤다. 마무는 키 크고 덩치 큰, '즐겁고 유쾌한' 게이 미용사였다. 그는 모히칸 스타일의 주홍색 닭벼슬 머리를 하고 있었다. 80패소(한화로 약 2000원)짜리 그의 가위질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덩치에 비해 가볍고 쾌활한 움직임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마무가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흐뭇해 하는 동안,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 새카맣게 탄 얼굴, 자글자글 패인 주름살, 어디선가 본 듯한, 늙은 '톰보이'였다. '넌, 누구냐?'

"강, 왜애? 조금 더 쳐 줄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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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숏 커트 하고, '넌 누구냐?' ⓒ 강은경


마무는 낭창낭창한 손짓으로 내려놓았던 가위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어깨까지 치렁거리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날아가 버려 그렇잖아도 어색해 죽겠는데, 여기서 더 짧게? 내 목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솔로 털어내며 마무가 콧소리를 높였다.

"팔라완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고? 너, 정말 멋지다아~!"
"마무, 너도 멋져! 그래, 인정! 넌, 훌륭한 예술가야!"

불현듯 궁금증이 일었다. <해피 투게더>, <토탈 이클립스>,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퀴어 영화 속의 사랑처럼, 마무의 사랑도 많이 아플까? 여운이 길었던, 그 가슴 저린 러브 스토리들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마무, 행복해?"
"물론이지!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해!"

그의 대답은 깔끔하고 단호했다. 애플 사의 최고경영자 '팀 쿡'이 커밍아웃을 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답이었다. 

"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며, 이는 신이 내게 준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인간이 알지 못할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로 여긴다고 했다. 그만큼 필리핀의 성 소수자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 시선들도 특별할 게 없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1억이 넘는 필리핀 인구 중에 3%가 동성애자들이라고. 전세계 동성애들도 3%라는데. 그런데도 유독 필리핀에 게이가 많게 느껴지는 건, 그들이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서 그런 걸까. '관대하다, 포용한다' 따위의 말들조차 필요 없는 분위기. 한국의 분위기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서울에서 동성애자들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10여 년 전의 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희곡작품을 구상할 때였다. 서울 낙원상가 근처의 게이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카페의 '손님'들을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직장에서 막 퇴근하고 온 듯, 와이셔츠와 양복바지 차림의 깔끔한 남자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나는 그때 금녀(禁女)의 카페에 들어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카페마다 꽉꽉 찬 동성애자들. '벽장 속에서 나오지(coming out of closet)'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이토록 많았나?' 싶어서 또 놀랐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성 소수자들을 존중하자는 인식이 커져가고 있다. 커밍아웃한 연예인, 영화감독 같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고, 동성애자들의 거리 축제인 '퀴어 문화축제'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은 여전히 성 소수자에 대해 보수적인 마인드를 고집하고 있다. 의식이 참 후졌다.

"강, 여행하다가 머리 깎고 싶으면 또 와~~! 즐거운 여행해~!"

마무의 섹시한 콧소리를 들으며 미용실에서 나왔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의 거리. 그래도 짧게 친 머리 때문인지, 머리통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시청 뒤쪽 언덕을 향해 그늘 속을 골라 걸었다. 그곳에 전망 좋기로 이름난 리조트가 있다. 아침에 타이 타이에 토착해 시장 통의 싼 숙소에 이미 짐을 푼 뒤니, 순전히 타이 타이를 조망하러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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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들 ⓒ 강은경


가는 길에 농구를 하는 어린 소년들을 보았다. 나무그늘 아래라지만 더운 날인데. '필리핀엔 농구대가 왜 이렇게 많지?' 필리핀에선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거다. 그동안 나는 또 매일 한두번은 농구대를 보거나 농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맨발이거나 '쪼리'를 신고 뛰는 소년들. 마을축제나 행사 때는 확성기로 현장에서 농구 중계를 하며 경기를 했다. 구경꾼들이 모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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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축제 농구경기 모습 ⓒ 강은경


필리핀의 농구는 7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 최강이었단다.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농구. 필리핀의 10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농구라는 스포츠를 이용했다는 말이 있다. 그는 농구를 국기로 인정했고,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필리핀에서 프로 농구가 출범했다. 농구는 그렇게 필리핀을 대표하는 스포츠 종목으로 자리 잡게 됐다.

필리핀 사람들이 대부분 키가 작아 농구경기에 유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몸 움직임이 민첩하고 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다. 남자라면 다 저렇게 매일 농구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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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리' 신고 농구를 즐기는 소년들 ⓒ 강은경


10여 분쯤 걸려 올라간 언덕 위엔 부겐빌레아, 풀루메리아(칼란추치), 알라만다 같은 열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언덕바지에 리조트의 코티지 몇 동과 레스토랑, 그 주변으로 꽃이 아름다웠다. 레스토랑 베란다가 전망이 시원하고 좋았다. 산타 이사벨 요새(Santa Isabel Fort)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요새 앞으로 펼쳐진 바다.

동쪽 해안도시 타이 타이는 산타 이사벨 요새로 유명한 곳이다. 필리핀 관광객들이 역사의 흔적을 찾아 팔라완에서 가장 많이 찾는다는 곳. 미국 신민지 시절에는 팔라완의 주도였다.

나는 오늘 아침 9시, 이곳에 도착했다. 엘니도에서 7시 20분 로컬버스를 타고 남동쪽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려왔다. 오자마자 산타 이사벨 요새를 구경하고, 시내를 배회하며 코코넛 오일 공장과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메뉴 보시겠어요?"

베란다 끝에 서서 타이 타이의 전망을 즐기고 있는데, 레스토랑 직원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메뉴판을 받아 넘겨보았다. 150패소 이상 가격의 메뉴들. 가까운 테이블에서 젊은 유럽인 커플이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을 슬쩍 훔쳐봤다. 피자와 스파게티. 군침이 흘렀다. 점심을 걸러 허기진 상태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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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타이의 산타 이사벨 요새와 바다 풍경 ⓒ 강은경


한 번쯤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비싼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아니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메뉴판을 직원에게 넘겨주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시내로 내려가 '투루투로(골라 골라 라는 뜻)라는 간이식당에서 현지인들이 먹는 싼 음식을 사 먹을 생각이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메뉴였다. '나는 아마추어 관광객이 아니라 명색이 프로 여행가잖아.' 그렇게 자화자찬 위로하며, 가벼운 돈지갑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몸무게를 재보진 않았지만, 벌써 살이 많이 빠졌을 것이다(팔라완 두 달 여행을 끝냈을 때, 11kg이 빠졌다).      
#팔라완 #동성애자 #성소수자 #배낭여행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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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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