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날 기를래?'... 아이의 반응에 실성할 뻔

[10만인리포트-입양을 인터뷰하다⑫] 연장아 입양한 차성수 유현미 부부②

등록 2015.04.01 22:52수정 2015.04.0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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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지난주 기사 (관련 기사 : 마흔 아홉에 얻은 둘째, 아빠는 화장실을 못갔다)가 올라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지 않은 파장이 있었다. 조금은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인터뷰이 중 한 분, 차성수씨는 현직 구청장이다. 정치인으로서 부담감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시설 아이들의 유일한 입양 통로인 연장아 입양에 대한 사회적 환기와 더불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공개 입양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돌려보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필자 또한 이 부부의 입양 이야기는 연장아 공개 입양을 고려 중인 사람들에게 적절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후 인터넷 댓글 중 일부는 가족에게 칼이 되어 돌아왔다. 정치적 진영 논리 때문이든, 공개 입양에 대한 부정적 편견 때문이든 해선 안 될 상상 이상의 말들이 나왔다.

그 상처가 오죽했으면 더 이상 기사 연재를 중단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을까. 하지만 이 기사를 챙겨보는 독자들을 위해, 대한민국 입양 문화가 다만 조금이라도 진전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위해, 며칠 숙고한 끝에 인터뷰 기사를 이어나가도 좋다는 어려운 승낙을 받았다. 다만 3회로 기획했던 기사를 2회로 마감한다. 이 점을 양해 부탁 드린다. 이 기사는 엄마인 유현미씨의 시각으로 인터뷰 내용과 일기의 일부를 재구성했다. - 기자말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 가르쳐야했다

혜인이는 처음부터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우리 집에 온 건 아니었다. 이미 여섯 살. 그 나이면 아이만의 성격이 분명히 형성됐을 시기고 제가 살아온 삶의 이력으로 생각의 틀도 나름대로 갖춰놓은 상태였을 터다. 물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게 인간의 유연성이지만, 그러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탐색과 견제와 싸움과 갈등과 화해가 있어야 하는지 누구도 그 결말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혜인이는 더구나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지금까지 6년 동안 오직 시설에서만 살아 온 아이였다. 원장 선생님은 처음부터 입양이 아닌 '외출'이라는 형식을 통해 적응 기간을 가지길 원했다. 하지만 남편이나 내 마음은 형식과 무관하게 혜인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순간 우리 딸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혜인이는 혜주와는 또 다른 아이였다. 시설에서만 자라온 혜인이는 밥을 씹는 법도, 말을 하는 법도, 관계를 맺는 방식도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 혜인이는 그 모든 걸 잘 알지 못했고, 잘하지 못했다.


맨 처음 안았을 때 자식을 또 하나 얻었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쳤던 나와 달리 장작개비처럼 무표정하고 뻣뻣했던 아이였다. 혜인이는 모닝빵 한 개를 부스러기로 만들어 한 시간 넘게 먹을 수 있는 아이였다. 씹다 만 과일이며, 음식들을 집안 여기저기에 뱉어 냈고, 자동차를 '샤돈사'로 발음했다. 혜인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나쁜 습관들 그리고 진심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은 사실 이렇게 묻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도 나를 사랑하는 거야?'


혜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공동 시설에서 벗어나 가족이라는 따뜻한 공간에서 저만의 사랑과 저만의 소유 그리고 저를 중심으로 한 관계들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섯 살 혜인이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제 것에 대한 그것이 사랑이든, 물건이든 혹은 그게 무엇이든 저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가져 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취급하는 모든 것이 혜인이에게는 전혀 당연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낯선 것이었고 낯선 경험이었다. 삶은 어쨌든 자기가 보고 만지고 느꼈던 것들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태어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받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 속에서 삶을 시작하는, 그래서 자기 존재감에 대한 의심 없는 확신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엄청난 인생의 재산인지를. 

혜인이는 사랑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혜인이는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이었고, 사랑으로 커야 하는 작고 여린 생명이었다. 다만 혜인이는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누구와는 어떤 방식으로 맺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혜인이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에도 서툴렀고, 고맙고, 슬픈 감정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1.9kg으로 태어나 여섯 살이 되도록 시설에서만 자란 혜인이가 순전히 우리 가족이 된 그날까지의 그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을 다시 불러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혜인이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고, 그런 혜인이를 딱 그 나이에 맞는 아이로 변화해내기까지 우리는 매번 싸웠고, 매번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과 가장 고귀한 영성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야 했다. 사실 나도 반은 실성한 여자처럼 살아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혜인이가 오고 일 년이 지나고 있었다. 혜인이는 아직 정식으로 입양된 상태는 아니었다. 보육원에서도 언제든 돌려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혜인이를 외출 형식으로 집에 데려오고 일 년 뒤. 여전히 우리가 부모 자식이라는 굳은 사랑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지 못할 때였다.

그 때 시설로 다시 돌려보내도 됐다. 누가 뭐라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 법적으로도 사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닌 그저 남남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포기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임마누엘에서도 혜인이와 나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돌려보내고 싶으면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 속 깊이 그런 유혹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한 번 내게 왔으면 내 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식 문제만큼은 실패하고 싶지 않았고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교수직을 그만 두고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올 때였다. 남편이 오면 내 그런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절차를 밟았고 혜인이를 법적으로 입양했다. 이제 물리려야 물릴 수 없는 우리 집 큰딸이 된 것이다. 혜주가 세 돌 지나 네 살이었고, 혜인이 여섯 살 때 와서 여덟 살이 됐을 때였다.

 차성수유현미부부와 아들 그리고 세 딸
차성수유현미부부와 아들 그리고 세 딸유현미

열 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지만...

혜주와 혜인이를 차례로 입양하고 혜인이 때문에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도 우리는 김천 임마누엘을 계속 오가고 있었다. 다니던 교회에 이야기를 해서,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방학 때 가정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설에 가서 단 며칠만이라도 봉사하며 그 맑은 아이들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면 누구라도 나와 같을 것이다.

그 중 일곱 살 여자아이가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생모가 찾아오는 아이였다. 그 엄마와는 2년을 함께 살고 시설로 온 아이였다. 이혼은 했지만 친권을 유지하고 있던 나이 어린 생모였다. 도저히 자기가 직접 기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가끔 방송에서 터지는 의붓자식에 대한 또는 입양아에 대한 몹쓸 어른들의 몹쓸 짓들을 듣고 보노라면 입양을 보내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도 알고 천성적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아이는 엄마가 사 준 목걸이 하나를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일 년에 한 번 오는 엄마를 기다렸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일 년에 단 하루, 엄마와 만나고 헤어진 후 또 일 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게 아이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가 그것 말고 더 이상 자기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아이와 하필이면(?) 후원 연결이 됐다.

혜주가 네 살, 혜인이 여덟 살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큰엄마'라 불렀다. 첫 번째 가정 체험을 와서는 4박 5일을 있다가 갔다. 그 다음 방학 때는 와서 일주일을 있다가 '큰엄마' 집에서 살고 싶다고 울면서 매달렸다. 미치는 줄 알았다. 매달리는 아이를 뜯어서 보냈다. 보내는 내 마음도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아이는 다음 방학 때 와서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사랑이 고파 매달리는 아이를 또 뜯어서 내려보내면 그래서 그 아이가 이렇게 자라 사춘기가 되면 우울증이라도 걸려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있으라고 했다. 있어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입양해 키울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을 입양해주길 원했지만, 생모는 친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나도 이미 둘이나 입양을 했고, 혜인이와의 애착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여서 입양은 생각조차 못할 상황이었다.

몇 번 입양을 원하는 다른 가정을 찾아 아이를 소개했지만, 끝까지 인연이 되지 않았다. 아이 엄마도 입양에 필요한 친권 포기 서류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가 워낙 강력하게 입양을 원했기 때문에 엄마를 찾아 서류에 사인을 받으려 했지만, 아이의 생모도 삶이 간단치 않았는지 연락이 잘 되다 끊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 조용히 자기를 찾아 온 엄마 앞에서 아이는 울면서 애원했다. 제발 자기를 '큰엄마'에게 입양보내 달라고. 자기가 낳은 아이가 자기를 입양보내달라고 애원할 때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같은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도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다. 생모는 통곡하면서 친권 포기 서류에 사인을 했다.

다른 곳으로의 입양이 몇 번 좌절을 겪은 아이였다. 간절히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아이였다. 생모와의 서류 문제도 내가 나서서 처리해줬다. 생모도 내가 맡아주기만 한다면 안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혜인이 때문에라도 그리고 이미 둘씩이나 입양을 한 상황에서 세 번째 입양을 해야 하는 건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 앞에서 매일 울고, 매일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걸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남편이 혜인이를 입양할 때 했던 말로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어차피 꼬인 인생 더 꼬일 것도 없으니' 입양을 하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탐심이 있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여자답고 차분한 특성들이 혜주와 혜인이와는 또 다른 자식 욕심을 묘하게 불러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꼬인 인생, 이라는 남편의 말은 그런 내 저울질하는 마음 한 쪽에 큰 돌을 던진 것과 같았다. 결국 그렇게 그 아이는 내 세 번째 입양아이자 우리 집 둘째 딸 혜윤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다 아프다. 하지만 아픈 열 손가락은 제각각 결이 다른 통증이 있다. 자식 많은 집 부모에게 어떤 자식은 듬직하고, 어떤 자식은 애틋하고 또 어떤 자식은 죽도록 밉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가족은 그렇다.  

가장 먼저 입양된 혜주는 우리 집 막내딸이 된 지 십 년 됐고, 이제 열두 살이 됐다. 입양 와서도 한동안 아빠를 보면 질색했던 혜주가 아빠 품에 안겨 정면으로 눈을 응시하고 교감을 나눈 첫 날이 집에 온 지 백일 즈음 되던 때였다. 남편은 지금도 그 때 그 형용할 수 없는 벅찬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단다.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 말했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내게도 혜주는 내 살과 같은 존재다. 나는 아직도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혜주의 얼굴을 만질 때 뼛속까지 전해지는 사랑의 감정에 가슴이 시큰해진다. 큰아들이 본능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면 혜주는 본능보다 더 본능적인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행복하게 감당하는 엄마가 되다

혜주를 입양하고 4개월, 당시 여섯 살 때 우리 집 큰 딸이 되었던 혜인이. 시설에서만 자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큰딸 혜인이는 지금 열여섯 고등학생이 됐다. 긴 세월이었다. 거의 6, 7년을 차츰차츰 조금씩 좋아졌다. 처음 1, 2년은 죽도록 힘들었지만, 그 다음 몇 년은 죽지 않을 만큼만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럽게 혜인이가 변했다.

그것도 놀라울 만큼. 열여섯 혜인이는 이제 규율도 잘 지키고, 산만하지 않다. 거친 성격은 사라졌고, 먹기 싫은 반찬을 집어 던지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대안 학교에 다니는 혜인이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길진 않지만 제가 살아온 곡절 많은 삶이 혜인이의 정신을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게 어쩌면 혜인이가 글을 잘 쓸 수 있게 된 마중물이 됐음에 틀림없다. 지금 학교에서 혜인이의 별명은 '마마걸'이다. 어느새 든든한 우리 집 맏딸로 컸다. 혜인이를 통해 욕심 많고 실패를 모르던 나는 포기란 걸 알았고 그래서 사랑은 참고 기다리면 끝내 제 길을 찾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 집 둘째 딸 혜윤이. 눈물 많고 정이 많은 혜윤이는 지금 열다섯 중학생이다. 통곡을 하면서 친권 포기 서류에 사인을 했던 생모와는 몇 해 전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그 엄마가 새로 결혼을 한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혜윤이를 볼 때는 항상 생모가 생각났고 생모가 생각나면 혜윤이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자식은 기른 정이 분명하다. 혜윤이는 내게 사랑은 소유가 아니란 걸 알게 해줬다. 그저 자식이 행복하면 부모는 덩달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혜윤이는 지금도 눈물 많고 정 많은 행복한 열다섯 소녀다.  

어쩌다 보니 아이를 셋씩이나 입양한, 그것도 나이가 있는 연장아만을 입양한 사연 많은 엄마가 됐다. 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아들 하나 있는 우리 부부에게 딸이 셋씩이나 생겼고 지금은 자식 넷이 주는 각기 다른 사랑의 맛에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엄마가 되었다.

사랑은 처음부터 굳어진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많은 '탐색과 견제와 싸움과 갈등과 화해'를 거치면서 서로에게 맞는 사랑의 방식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다. 입양이라는 말을 아예 싫어하고 반대하는 어떤 사람은 '입양이 부모의 정신을 고양하는 수단이냐'고 조롱하지만, 입양이 아니어도 모든 자식은 '부모의 정신을 고양할 수밖에 없는' 귀한 존재다.  

그 귀한 자식을 넷씩이나 두고 사는 나는 정말 행복한 엄마가 맞다. 지금도 내 열 손가락은 하루가 멀다 하고 깨물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은 그걸 행복하게 감당하고 사는 게 엄마다. 그리고 그건 나 유현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덧붙이는 글 정치적 이해가 달라도 공개입양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도 아이들에게까지 상처가 되는 댓글은 없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댓글만 부탁하는 게 아니라는 걸 굳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입양 #차성수 #유현미 #공개입양 #연장아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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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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