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부영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이영광
-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어떻게 지내셨어요?"은퇴 선언한 다음에 비교적 한가했는데, 동아시아 평화문제 때문에 준비하는 일이 있어서 점점 바빠질 거예요."
- 정계 은퇴를 선언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2012년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은퇴를 생각했어요. 현역 국회의원보다는 국회의원 아닌 입장에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예를 들면 동아시아 평화문제라든지, 일본 평화헌법의 노벨상 수상 문제, 일본의 평화세력과 한국의 평화운동 세력 사이에 연대를 만드는 일은 지역구나 당의 일 때문에 하기 어려워요. 우리 안의 진보, 보수, 여야 정치인들을 묶어서 일본의 평화운동 세력과 연대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 일본 평화 운동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오래 전부터 일본 평화운동을 잘 알았어요. 원폭 피해자들을 돕는 운동이라든지, 일본 안에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하는 사람들을 잘 알고 지냈어요. 요즘 일본의 정치세력 가운데 평화 헌법을 꼭 지켜야 한다는 세력들과 자주 교류하면서 더 알게 됐죠."
- 정치인으로 25년을 사셨는데 돌아보면 어떤가요?"하루도 마음 편하게 산 기억이 별로 없어요. 남들은 어떻게 평가하든 제 소신대로 선택하고 행동했다고 생각해요. 왜 회한이 없겠어요? 제 자신이 언론계 출신인데, 언론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상황에 이끌려 정치 참여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런 게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1995년 야당의 분당과 한나라당을 선택할 때는 DJP연대보다는 조순, 이회창 조합이 더 죄가 없어 보였어요. 2000년에 6·15선언이 있었잖아요. 그때 한나라당 안에선 제가 유일하게 6·15선언을 지지했어요. 그랬더니 당 안에서 '당신은 빨갱이니 나가라'는 말이 나왔죠. 한나라당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고, 2003년에 탈당해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죠.
열린우리당 안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이 있었는데, 그때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고 했었죠. 당시, 당내 강경파들이 반대해서 개정하지 못하고 남았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어요. 그것이 저에겐 몹시 아쉬움과 한으로 남습니다.
그때 보안법을 개정해서 찬양, 고무, 동조, 회합, 통신 등 5대 독소조항을 걷어냈었다면 피해자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정치에서는 '달음질 처서 혼자 열 발자국 가는 것보다 열 사람이 같이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게 낫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죠. 의회정치는 그런 게 필요해요."
- 지난달 17일, 동아투위 40주년을 맞이했는데... 이번엔 좀 더 특별했을 듯해요. "일제 치하보다 긴 4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 법원은 그 사건에, <동아일보> 손을 들어 주는 나라입니다. <동아일보>는 '이제 1975년 대량해고 사태는 지나간 옛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사원들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권력과 사법부가 언론 소유주 편을 들고 있으니까 자기들이 옳았다는 거죠. 박종철 군이 죽은 뒤 민주주의가 세워지고 정의가 바로 서는 듯하더니, 사건을 은폐 조직하고 축소하던 자들이 더 득세하고 거기 가담하던 자가 대법관이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온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림없는 희망이라고 봐요.
시간이 흐르면 거짓이 잊히고 사라질 것이라 그들은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나 진실은 바람에 실려 오고 이슬비에 묻어 내릴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썩힐 거예요. 이런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서운 혁명의 폭풍이 몰려오도록 기도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이렇게 갈 순 없다고 생각해요."
"민주화 운동하는 동안, 장모님이 버팀목이 되었죠"- 젊은 세대들은 동아투위를 잘 모르는데 간략하게 설명 부탁합니다. "1970년대는 암울했어요. 3선 개헌 유신헌법 선포, 언론의 암흑시대를 맞아 당시 기자들은 기자직을 버리느냐 아니면 죽음을 걸고 싸우느냐 아니면 독재 권력의 시녀로 밥벌이나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번민했어요.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길을 선택했던 겁니다. 노조를 만들고 유신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어요. 처음에 130여 명이 해직되었죠. 그래서 동아투위를 결성했어요.
민주사회에서 언론자유는 어떤 자유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또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언론이 지나치게 소유주의 사유물처럼 되어서... 언론자유가 언론소유주만의 자유가 되고 있습니다. 언론이 썩고 있습니다. 언론을 소유주로부터 독립시키지 않으면 사유물, 독극물이 될 것입니다. 독립 언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언론인들이 집단으로 운영하는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가 나와야 합니다."
- 동아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는데 어땠어요?"16, 17일에 <동아일보> 앞에서 시위도 하고 프레스센터에서 기념식도 했어요. 최근 들어 성유보씨를 비롯해서 많은 동료가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마음고생과 생활고 등을 겪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지만, 저희는 나름대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시민과 언론인으로서 살다가 담담히 삶을 마치길 원해요. 그것이 저희의 길을 지키며 살아온 자부심이기도 해요. 큰 인물로 서서 자랑스러움을 드러내는 것도 인생이겠지만, 한국의 언론을 자유언론이나 독립 언론으로 만들기 위해 뚜벅 뚜벅 일생을 살아왔다면 그런 삶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해직된 후 생활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제가 못할 짓을 많이 했어요. 장모님이 대학교수였는데 홀몸으로 딸만 둘을 키웠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저에게 시집오고 얼마 안 되어,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후 제가 민주화 운동하는 동안 장모님이 제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죠. 장모님의 월급으로 저희 아이들 키웠어요. 그 와중에 장모님은 보직에 불이익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직급 강등을 강요받았죠.
저도 1980년대 초반에는 틈나는 대로 번역 일을 했어요. 제 이름으로 하면 안 되니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론>이나 해럴드 리스키의 <국가란 무엇인가> 등을 번역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자주 감옥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서 여러 책을 읽는 행운도 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