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들어섰지만 할머니들이 계속 싸우는 이유

[김성호의 독서만세 64]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

등록 2015.07.08 13:24수정 2020.12.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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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탈송전탑 원정대 책 표지 ⓒ 한티재


저는 이 일을 '나라 지키는 일'이라고 하거든예. 농성장 당번 서는 날이면 집 나서면서 우리 아저씨한테 저는 "나라 지키러 갑니더" 하고 나옵니더. 저는 나라 지키러 간다 카지, 데모한다 카지 않습니더. 나라 지키는 거라 생각하고 싸워보입시더. - 124p

6.11 행정대집행. 송전탑 건설을 막아내기 위해 온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버티던 밀양의 할매들이 공권력에 들려 '철거'되던 그 날을 기억한다.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내가 사는 마을에 내 가족 내 이웃의 건강을 망치는 건조물을 들이지 못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거부가 그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묵살되었던 날을.

그날 이후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매일같이 산에 올라 공사현장을 막아섰던 할매 할배들이 있던 자리엔 매일같이 고압전기를 실어 나르는 100m 높이의 철탑이 우뚝 솟았다. 그 철탑의 한 쪽 끝에 전기의 사용자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생산자가 있다. 사용자 대부분은 기업과 대도시 주민들이고 생산자는 핵발전소 등 발전시설이다.


밀양지역 주민들이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토록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건 밀양지역이 사용자와 생산자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신고리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서울 및 수도권까지 송전하기 위해서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밀양에 69기의 송전탑이 건설되기에 이른 것이다.

밀양 주민들이 알게 된 몇 가지 진실

긴 세월을 투쟁해오며 밀양 주민들은 몇 가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송전탑이 주변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을 망친다는 것과 한국 사회에는 더 이상의 전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계속해서 핵발전소와 송전탑이 들어서게 되는 이유까지. 주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나서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아닌 이웃과 자손, 나라를 위해서.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온 밀양의 싸움은 이제 일단락 된 것처럼 보인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피땀 어린 싸움을 벌여왔지만 정부와 한전의 계획대로 송전탑이 들어서는 걸 결국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양 할매 할배들이 들어선 송전탑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아득해진다. 더없이 허탈하고 무력했을 것이다. 패배감도 들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싸움이 패배로만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밀양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정부의 전력정책이 조금이나마 바뀌었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짓밟아온 핵마피아, 전력마피아의 독재에도 흠집이 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밀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과다.


그래서일까. 송전탑이 모두 들어선 지금까지도 밀양에는 아직 225세대가 한전과 합의하지 않은 채 투쟁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이제 취재기자와 연대활동가의 발길도 뜸해지고 주변 사람조차 농성을 풀고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할매 할배들의 각오엔 변함이 없다.

이제 이들의 운동은 단순히 송전탑의 건설에 반대하는 걸 넘어 정부의 전력정책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10년 간 철탑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철탑을 따라가니 그 끝에 핵발전소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힘없는 노인들을 무자비한 공권력으로 제압한 경찰관의 직책만 높아지는 게 아니다. 한 쪽에선 지역단위의 송전탑 반대운동이 전국의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탈핵운동으로 진화하는 풍경도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옳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틀린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우리 재산과 건강권을 지키려고 싸운 게 맞아요.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게 인권의 문제인 것을 알겠더라고. 전기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그런데 한전과 정부는 전기가 먼저라는 식이었어요. 우리 사회 정의를 짓밟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 소수자인 약자들이 당하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긴다 진다, 그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바르게 하다가 가는 겁니다. 온갖 협잡 회유, 다 보지 않았습니까. 주민들 꼬여서 밥 사주고, 자식한테 전화해서 자식들 불안하게 해서 자식이 부모한테 전화하게 만들고, 공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이래서 되겠냐, 이겁니다. 우리는 그걸 용납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 45p

한티재에서 지난 5월 펴낸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는 '밀양 송전탑 투쟁'이 '탈핵 탈송전탑 운동'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2015년 3월 한 달 동안 밀양 할매 할배들이 전국의 핵발전소와 송전탑 지역을 돌아다니며 겪고 만나고 깨달은 것들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일정과 방문지에 따라 네 개의 원정대가 꾸려졌고 모두 열여섯 명의 주민과 세 명의 밀양대책위 활동가가 참여했다. 이들이 누빈 거리는 무려 2900km에 달한다.

책은 밀양의 투쟁은 물론이고 한국 전력산업이 처한 딜레마, 핵발전소나 송전탑 인근 주민들의 삶, 반핵운동의 역사와 현황 등을 폭넓게 아우른다. 어느새 '탈핵 탈송전탑' 활동가로 거듭난 밀양의 할매 할배들은 원전이나 송전탑이 들어섰거나 들어서려 했던 전국 여러 지역을 방문해 해당지역 주민들과 대화하고 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원정대의 발길은 한국 반핵운동의 중심지라는 영광에서부터 횡성, 평창, 여주, 광주, 안성, 고리, 월성, 삼척, 울진, 영덕 등에 두루 닿는다.

이미 여러 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왔고 보상이나 이주와 관련한 약속은 물거품이 된 고리와 월성의 아픔과 답답함이 생생하다. 주민투표까지 실시해 원전 유치를 거부한 삼척의 영광은 더없이 짜릿하다. 송전탑과 관련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횡성, 평창의 문제는 심각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던 전기산업 이면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겪어온 지역 주민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가 상당하다.

책을 읽다 보면 정부와 공기업이 얼마나 비겁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해왔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많이 발전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부정선거와 금품살포를 일삼고 거짓약속과 폭력진압을 주저하지 않는 이 나라 정부, 경찰, 공기업을 보면 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반면 희생하고 연대하며 마침내 정부와 기업의 압력으로부터 권리를 지켜내는 주민들의 모습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찌 보면 이들과 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과정을 보며 국가란 무엇이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유권자를 조작하고 지역사회를 갈라놓는 정부와 공정한 주민투표를 감행하고 다른 지역을 찾아 연대하는 시민들의 구도가 너무도 명확해 책을 읽는 내내 민망하고 답답한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밀양의 일은 밀양의 일만이 아니다. 삼척의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 우리는 밀양과 삼척, 울진과 고리, 그 밖에 수많은 감춰진 역사를 들춰내 알아야 한다. 약자에게 강요된 희생에 눈 감고 나의 편안함만 생각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비겁한 자들의 세상엔 미래가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치부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한 책무이며 우리가 속한 이 사회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밀양은 아직도 225세대가 합의하지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고향 산천을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싶은데, 곧 죽을 때가 되었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오늘 여기 와 보니, 정말 걱정스럽고 두렵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가도 되겠나,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정부와 한전은 후손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서 눈앞의 이익만 생각합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 30p
덧붙이는 글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밀양 할매 할배들 지음 / 이계삼 기록 / 한티재 / 2015.05. / 1만5천원)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 - 밀양 할매 할배들이 발로 쓴 대한민국 ‘나쁜 전기’ 보고서

밀양 할매 할배들 지음,
한티재, 2015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 #한티재 #이계삼 #이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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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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