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우(1909~1949)와 부인 김종숙박치우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해 1936년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전까지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남로당 활동을 전개하며 <현대일보> 편집인으로 있다가, 우익의 탄압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월북했다. 김일성의 만주파와는 거리를 뒀고 1949년 빨치산으로 남파 돼 유격활동을 벌이다 태백산에서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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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이승만이 건국에 참여했고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보다, 누구를 위해 참여했고 추구했느냐가 중요하다. 이승만과 동시대를 살았던 박치우는 이 점에서 철학의 '당파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철학자였다. 당파성(黨派性)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철학도 현실사회의 무리와 파벌에 따라 이해관계를 가지며, 서로 다른 실천적 지향성을 띠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유학사상,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사상, 서양의 중세 성직자들은 스콜라 철학, 프랑스혁명 때 부르주아들은 사회계약론인 식이다. 그밖에 철학이 당파성을 띠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결국 철학의 출발은 삶과 사회에 대한 순수한 고민이지만, 현실에 실현하고자 실천과 결합할 때 정치적 당파성을 띠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박치우는 이를 자연스러운 일로 보면서, 8.15 해방정국에서 이승만과는 차별화된 당파성을 보였다.
이승만의 자유는 '우익'을 위한 자유소련과 미국은 임의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해 각각 북쪽과 남쪽에 들어섰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지만, 미군과 함께 들어온 이승만은 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잘 알려졌듯 극렬한 반공우익었던 이승만은 좌익들을 '싸잡아' 싫어했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 이승만(1946.5.20)마르크시즘에 영향을 받은 박치우도 좌익이었다. 그는 <현대일보> 편집인으로 언론활동을 하면서 좌익의 관점에서 대중을 설득하고, 남로당(남조선 노동당)을 조직화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남한 내 그의 활동은 1년 만에 강제로 끝난다. 우익 청년조직이 그의 신문사에 테러를 가하고, 강한 비판 논조를 의식한 미군정이 정간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지만, 1946년 '10월 인민항쟁'으로 지명수배 되면서 그해 겨울 어쩔 수 없이 월북한다(남로당 지도부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체포를 당했다). 남한의 좌우익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