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스트 라복임씨. 사람들은 그녀에게 "꽃장사 하면서 무슨 독일까지 가서 공부해요?"라고 묻곤 했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우리나라는 자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OECD 국가들보다 두 배나 많다고 합니다. 창업하고 3년 안에 닫는 가게는 47%, 10년 안에 닫는 가게는 75%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가게들, 10년 이상 된 우리 동네 가게를 찾아갑니다. - 기자 말
"아버지는 제가 돌이 되던 해 돌아가셨어요. 3남 1녀 중에서 제가 막내인데 저보다 열두 살 많은 큰오빠가 생계를 책임졌어요. 지금은 노력해도 안 되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 고생하면, 다 먹고 살았잖아요. 오빠들이 서울 올라와서 가구 공장을 했어요. 너무 고생하는 걸 옆에서 봤죠. 저보고 대학 가라고 했지만, 영신여고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들어갔어요." 1979년 3월, 스무 살 복임씨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서 종로 3가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했다. 중간 지점인 청량리를 지날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단 한 곳, 화우회. 복임씨는 주로 상류층의 취미였던 꽃꽂이를 배우기 위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월급 15만 원을 받는 데 학원비는 5만 원. 먹고 사는 것하고 아무 상관 없는 꽃꽂이가 좋았다. 무한한 재미를 느꼈다.
"고향이 전남 나주예요. 집 울타리에 탱자 꽃이 피고, 뒤뜰에 동백나무가 있었죠. 낙원이었어요. 여덟 살 때 광주로 왔는데 대도시잖아요. 골목마다 연탄재가 있으니까 칙칙하죠. 하교 길에 유리창이 깨져서 테이프로 붙여 놓은 꽃집이 있었어요. 그 안에 하얀 국화가 예뻐서 오래 들여다봤죠. 서울에서 여고 다닐 때도 특별 활동으로 꽃꽂이를 했어요. 금잔화하고 다래 넝쿨로 첫 수업을 했는데 지금도 선연해요."화우회에서 꼬박 3년간 꽃꽂이를 배운 복임씨. 공릉교회의 꽃꽂이를 맡게 됐다. 스물세 살 아가씨는 토요일마다 새벽 4시 첫 차를 탔다. 남대문의 대도 상가 2층에 있는 꽃 도매시장에 갔다. 형형색색의 꽃들, 황홀했다. 한 아름 사서 회사로 갔다. 시들지 않게 화장실 한쪽에 물을 받아 꽂아두었다. 퇴근할 때 꽃을 안고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서 교회로 갔다.
복임씨는 교회 청년회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다. 끝나고 나면 오후 11시, 그때부터 교회 안에 꽃을 꽂았다. 그때는 교회 꽃꽂이에 대한 책이 따로 없어서 청계천 책방을 뒤지고 다녔다. 꽃꽂이가 나와 있는 외국 책을 샀다. 내용은 모르지만 사진이 있으니까 이해가 됐다. 그래서 응용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면, 부케와 꽃길도 만들었다.
잠 자는 것보다 꽃꽂이가 더 좋았다"라복임 선생님, 꽃 넘어졌다!"
일요일 새벽, 어쩌다 공릉교회에서 걸려오는 전화 내용은 똑같았다. 꽃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플로랄 폼이 없던 시절, 침봉에 많은 양의 꽃을 꽂으면 쏟아지기도 했다. 복임씨는 정신 없이 교회로 달려갔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쓰러진 꽃을 일으켜 세워서 고정했다. 주말에는 거의 잠을 못 잤는데 피곤한 줄도 몰랐다. 꽃꽂이 하는 게 자는 것보다 좋았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벌인 어음 사기 사건은 나라를 흔들었다. 큰 회사가 넘어지고, 맞물린 작은 회사들이 망했다. 은행 앞에는 대출 받으려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대열 속에는 복임씨 오빠들도 있었다. 집을 저당 잡힌 큰오빠. 큰오빠네 집에서 살던 복임씨와 어머니는 둘째 오빠네로 갔다. 몇 달 살다 또 큰오빠네로, 또 둘째 오빠네로 옮겨 다녔다.
"그 상태에서도 저는 꽃꽂이를 하고, 교회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야학 선생도 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으니까요. 식구들은 나중에야 제가 야학 한다는 걸 알았죠. 오빠가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면서 '싸대기'를 때린 적도 있어요. 주거가 계속 불안하니까 서글프고, 자존심도 상하고. 내 신념도 신념이지만, 차라리 결혼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