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덕씨는 처음에 파리에 갔을 때 쁘렝땅 백화점 옆에 있는 샵에서 패턴(옷감을 재단하기 위해 종이 로 만든 옷 본)을 무지 많이 샀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그 뒤로 매년 파리에 갔다.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가 왕비일 때부터 전속 패션디자이너 개념이 생겼다는 프랑스. 오랜 역사 속에서 패턴은 얼마나 정확하고 근사하게 발전했겠는가. 인덕씨는 파리 시내를 걸으면서 사람들 옷을 봤다. 오래된 성당을 만나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움에 압도되어서 자신이 작게 느껴졌다.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인덕 선생님, 서울로 오실 생각 없으세요? 제가 (의상실) 대드릴게요." 패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덕씨를 몇 번이나 유혹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대한민국 패션의 선두주자'는 지방에 사는 사람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들이 둘인 그녀는 서울로 갈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게 낫다고 봤다. 통 크게 세계를 보며 일하고 싶었다. 그편이 아이들 교육에도 좋겠다고 여겼다.
미국 하와이에는 아는 동생이 살았다. 인덕씨의 남편이 먼저 하와이에 갔다. 영주권까지 딴 남편은 몇 달 만에 "나는 미국에서 못 살아"라고 했다.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에서 못 살 이유가 무엇인가. 인덕씨는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날씨가 좋았다. 여자들은 외출복으로 롱 드레스를 주로 입고 다녔다. 백화점 입점을 생각해볼 만했다.
"나는 거기서 살고 싶었어요. 이민 서류까지 다 썼잖아요. 애들 교육도 좋고요. 그런데 남편이 도로 가겠대요. 한 달 넘게 서로 사느니 못 사느니 하면서 싸웠어요. 결국, 한국 가서 이혼하자면서 왔어요. 그 후 한 달간 기도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주어진 이 자리가 최고다,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떠올리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군산에서 더 열심히 살게 된 거예요." 세상은 바뀌었다. 기성복은 점령군처럼 와서 빠르게 맞춤옷들을 잠식해갔다. 수많은 패션디자이너들이 기성복을 만드는 대기업으로 들어갔다. 개인 디자이너들은 날마다 초조하게 매출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방의 의상실들도 거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인덕씨는 여전히 '키티 의상실'을 했다. 그리고 계속 파리에 갔다.
파리에서는 매년 옷감 쇼도 열린다. 그 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인덕씨는 샤넬, 디올, 발렌시아의 옷을 만드는 옷감에 끌렸다.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 패션업계의 사람들은 "(지방 의상실 하면서)뭐 하러 자주 와요? 10년에 한 번씩 와도 되겠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패션은 항상 새로웠다. 지방에서 의상실을 하고 있어도 파리에 와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다녀오면 시차 적응도 없이 열심히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