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준을 그냥 보내다니... 장사꾼 되긴 글렀다

[류외향의 자연주의 음식과 삶의 이야기 ⑤] 마라도로 간 시인과 낚시꾼

등록 2015.10.22 10:56수정 2015.11.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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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최남단 마라도. 금섬이어서 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더 슬픈 섬. ⓒ 류외향


마라도에 산다는 이유로 방송을 타는 일이 잦다. 마라도는 최남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섬 이상의 섬이었다. 2002 월드컵 때는 생방송 차량이 들어와 골대가 갖춰진 잔디밭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응원하는 모습을 내보내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선거를 앞두고 당 대표가 헬기 타고 등장하기도 했고, 무슨 당을 창당한답시고 마라도 주민을 발기인 이름에 올리고 창당대회에 초청하는 등 최남단이라는 걸 곧잘 이용해먹곤 했다.


전교생이 두 명 또는 세 명뿐인 마라분교의 아이들도 전파를 곧잘 탔다. 마라도에서 짜장면을 시켜도 잘 터진다는 설정의 휴대폰 광고에 등장하면서 이 광고 속 멘트를 본 딴 짜장면 체인점 업체까지 등장했고, 실제 마라도에 그 업체 간판을 내건 마라도점이 생겨 해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우리 역시 마라도에 산다는 이유로 방송에 노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마라도로 살러 들어온 신혼부부 콘셉트의 <다큐 3일>이었다. 그런 뒤 선배 작가들이 마라도까지 시집을 가버린 후배 시인 얼굴이라도 보자고 일삼아 들어왔다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려주는 바람에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강기희 소설가와 이대흠 시인의 글이었다. 누가 봐도  어느 처자의 마라도행이 사건은 사건인 모양이었다.

같은 방송국 안 두 프로그램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엔 스케일이 달랐다. 무려 30분짜리와 5회 연속 휴먼다큐였다. 마침 그 무렵, 임신 7개월에 접어들어 육지로 태교 여행을 떠났던 때라 평택의 내 집에서 담당 PD들과 만나기로 각각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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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를 찾아와준 이대흠, 정병근 시인 ⓒ 류외향


두 PD 모두 우리 부부가 어쩌다 짜장면집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했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해 여름의 잔인한 폭행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 글에선 자세히 언급하긴 어렵지만, 이 사건은 우리가 짜장면집을 하게 된 이유의 전부여서 우리의 이야기를 풀다 보면 자연스럽게 등장하곤 한다. 언젠가 독자분들에게 간략하게나마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 결과 30분짜리 <휴먼다큐 사미인곡>(KBS)은 촬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휴먼다큐 장수 프로그램인 5회 연속다큐는 포기했다. 상가를 찍다 보면, 다른 상가에서 제동을 걸어오는 일이 잦은데,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더 힘들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휴먼다큐 사미인곡> PD에게 전하며 당신네들은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같은 방송국, 같은 채널인데도 잣대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런데 그 포기한 프로그램에서 그 다음해 우리 옆집에 새로 생긴 짜장면집을 촬영해 내보냈다. 모른 체 하고 크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적잖이 언짢았다.


마라도에서 친정 엄마와 상봉, 처음으로 눈시울이...

일주일 동안 촬영이 이어졌다. 주방일, 서빙일, 낚시, 산책, 조산원 검사 등의 일상이 있는 그대로 이어졌다. 기승전결이나 절정이 따로 있을 리 없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PD는 작은 사건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 친정 부모님이 오시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나로서야 반가운 일이었다. 비행기 삯까지 지원해준다니,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었다.

하여 작은언니가 엄마를 모시고 마라도에 오게 되었다. 그때 그렇게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엄마가 마라도 땅에 발을 디딜 일은 천지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평생을 해오던 구멍가게 문을 하루라도 닫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던 엄마였다. 방송은 엄마를 움직였다.

선착장에서 엄마 얼굴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건 역시 그곳이 마라도였기 때문이었을까?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어디 천리만리 먼 이국땅으로 시집 간 딸 찾아온 엄마를 만난 상봉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할매 곁에서 산 날이 더 많았고, 대학 시절부터 늘 타지 생활을 했던 터라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엄마 앞에서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불콰해지는 눈시울에 내가 더 당황했다. 얼른 수습하려고 감정을 꾹꾹 눌러 버렸다. 엄마를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리거나, 적어도 눈물 한두 방울은 떨구었어야 더 감동적인 '씬'이 나올 텐데, 방송으로서도, 나로서도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오붓하게 마라도 억새밭 사이로 산책도 하고, 남편이 잡아온 긴꼬리벵에돔으로 맛난 상도 차려 먹으며 행복한 며칠을 보냈다. 그런 귀한 기회를 제공해 준 방송에 참 많이 고마웠다. 친정식구들은 남편이 사내였을 때부터 좋아했다. 인물도 순하기 그지없고, 목소리마저 한몫했다. 노처녀 딸의 나이는 신경을 쓰면서 노총각 사윗감의 나이는 '더하기 10'이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마라도라는, 잘 들어보지도 못하던 섬에 살고 있어도 말이다.

물론 결혼의 조건은 사내가 육지로 나온다는 것이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얼른 치워버려야 할 '똥차'였는가 섭섭할 정도였고, 어렵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까 걱정하는 게 눈에 보일 지경으로 사윗감을 신뢰했다.

그런 사위를, 사위의 텃밭인 마라도에서 만났으니, 그곳이 아무리 황량한 외딴 섬이어도 사위는 빛이 났다. 짜장도 맛있게 만들었고, 손님을 끌어들이는 재주도 좋았고, 장사도 잘 되었고, 결정적으로 칠십 평생 처음 보는 진귀한 물고기를 잘도 낚아 와서는 슥슥슥 회 치고 지리 끓여 차려내는 솜씨는 가히 능력자의 그것이었다.

거기에다 방송 출연이라는 행운을 누리게 되는 것 또한 사위 덕이었으니, 그 며칠 동안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장모 같았다. 물론 임신한 딸자식이 장사하는 모습이야 애처로웠겠지만, 엄마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했다. 비록 경제적으로 고생은 해도 좋은 남편 만나 알콩달콩 살면 그게 행복이라고 여겼고, 마라도에서의 우리를 지켜보고 가면서 한시름 놓았다며 안도했다.

엄마는 지금도 우리 부부의 금슬이 무지하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늘그막에 결혼해서도 아이를 둘씩이나 순풍순풍 낳았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맞다. 두 아이 모두 임신을 하지 않으려던 상황에서 생겼다. 이해불가한 결과여서 매번 난감했지만, 속궁합이 좋으니 그리 되었을 거라 여기기로 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게 밤의 거사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말이다. 성격으로 말하자면, 둘 다 순하지 않다. 우리 엄마가 가까이서 오래 볼 일이 없다 보니, 사위 성격이 순해서 딸자식 성깔머리 받아줄 위인은 되겠다 믿을 뿐이다.

남편은 나만큼이나 한 성질 하신다. 신혼 때는 이 성질머리를 드러내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공구 들고 일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계가 마치 사람인 양 성질을 부렸다. 아마도 내가 남편한테 최초로 충격을 받았던 때가 바로 그런 때였을 것이다.

한 성질 하는 우리 부부, '이 궁합' 때문에 산다

그 무렵에는 본연의 그 게으름대마왕 행태 때문에 시작되는 나의 잔소리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 묵묵부답에 더 환장하겠는 나는 잔소리를 넘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남편도 어느 날부터 드디어 나에게 성질을 드러내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부부싸움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평택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부부싸움을 처음 하고 났을 때는 곧 헤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엄습해오고, 너무 심했나 하는 미안함과 낭패감이 밀려오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무뎌지기 마련이다.

다행인 것은 싸움 후 냉전 상태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루 24시간 꼬박 붙어 지내야 하는 사이이고, 일을 하기 위해선 서로에게 말을 건네야만 하고, 손님을 향해선 늘 미소 짓는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는 처지라 싸움은 하루 이틀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야말로 '쇼윈도 부부'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여느 부부처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늘 대기 중이었다. 섬이어서, 책임감이어서, 개들 때문에, 연민이어서, 돈이 없어서, 미련이어서, 빚이 늘어가서, 짠해서, 짜장면이어서, 아이 때문에, 미운 정이어서, 고운 정이어서……

고맙게도 우리 부부에게는 절대적으로 합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먹거리에 관해서다. 지금 표방하는 '자연주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제주에 다시 내려온 2013년부터이고, 그 전에는 딱히 규정할 이름이 없었다. 'MSG를 넣지 않는다', '톳을 사용한다'에 방점을 두고 홍보를 할 뿐이었다.

맨 처음 MSG를 빼자고 나선 것도 남편이었고, 뒤이어 설탕도 문제가 많다더라고 나선 것도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식재료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거였다. 결국 남편으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음식을 팔아 남을 먹이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조금씩 생각을 깊이하게 되었다. 잡지와 책을 통해 첨가물 및 유전자조작생물체(GMO)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식품(첨가물)산업과 자본주의와 우리의 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한 권씩 뗄 때마다 남편에게 브리핑을 해주었고, 남편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것을 요리에 접목시켰다. 우리 식구의 식생활도 빠르게 변해갔다. 남편도 나도 형제 많은 집안의 막내여서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한 부류이다. 그래서 배려를 덜 받는다는 느낌,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일단 수용하기보다는 일단 되받아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먹거리 문제만은 예외다. 남편은 내가 전해주는 정보를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실행에 옮긴다. 그럴 수 있는 마음가짐이 고맙고,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존경스럽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남편이 내로라하는 유명 셰프들과 우리가 쓰는 자연주의 양념만 가지고 요리대회를 하는 상상을 가끔씩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쨉'도 안 된다. 아무튼 엄마가 믿는 만큼 깨가 쏟아지게 사는 건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궁합은 모두 찰떡이니, 이만큼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엄마와 언니를 배웅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다시 배를 타고 손을 흔들고는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방송으로 본 내 뒷모습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사람의 뒷모습에서 마음을 읽어낼 줄 아는 이라면,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내 눈물도 보았으리라. 그러고 보니, 엄마를 맞을 때는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눈물을 도로 삼켰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등짝으로 흘리는 눈물이라니….

첫 배로 몰려든 '아줌마떼', 방송의 위력을 실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마라도로 간 시인과 낚시꾼'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탔다. 바로 다음날, 첫 배가 들어오자마자 아줌마떼가 몰려왔다. 전날 밤에 묵었던 숙소에서 우연히 틀게 된 채널에서 우리 이야기가 딱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방송의 위력을 실감하며 한동안 붐비는 손님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세 번째 후발주자 짜장면집으로서 우리는 내세울 게 없었다. 톳면을 사용한 톳짜장과 3무(無화학조미료, 無정제설탕, 無유전자조작식품)를 적어 놓았지만, 거의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방송 나온 덕을 보겠다고 커다란 간판을 새로 해다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운 일이다. 육지에서도 방송은 많이 나갔지만, 현수막 하나 내다 걸지 않았는데, 단골 장사가 어려운 마라도에서는 무조건 눈에 띄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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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낚시꾼' 간판으로 갈아탄 마라도 가게 ⓒ 류외향


휴먼 다큐가 음식이 중심이 되는 방송보다 효과는 더 좋다. 사람들은 음식보다 사람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사람들은 짜장면을 먹으러 온 김에 우리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구경하러 온 김에 짜장면을 먹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신기해했다. 시인과 낚시꾼의 결합을 21세기 들어 실종된 줄만 알았던 낭만을, 다른 곳도 아니고 무인도 같은 그런 섬에서 찾은 것을 감개무량해했다. 엄마뻘 되는 분들은 특히 나를 짠하게 여겼다. 다 우리 엄마 덕분이다.

그것보다 더 효과가 좋은 방송은 연예인이 와서 먹어주는 '먹방'이다. 요즘처럼 '쿡방'이 없던 시절엔 연예인 먹방이 최고였다. 음식의 질이나 맛은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스타급일수록 '방송빨'은 진정 오래 간다. 그 집 메뉴에 해당 연예인 이름이 붙어 온라인을 타고 전파되기 시작하면 그 영향력은 족히 십 년은 내다봐도 된다.

우리 가게에도 연예인이 오긴 왔었다. 오긴 왔는데, 다들 방송과 무관하게 와서 덕은 못 봤다. 마라도에 있을 땐 부부 가수 정태춘, 박은옥 님이 오셨다. 이분들과는 내가 평택 살 때 그 앞동네인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 확장 이전 반대운동을 함께했던 인연이 있었다. 내가 마라도에 들어가고 맨 먼저 나를 찾아온 손님이어서 진짜 눈물 났다.

그리고 강산에가 마라도에 공연하러 왔다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들러주었고, 지진희, 김하늘도 마라도에 드라마 촬영 왔다가 이장이 지정해준 짜장면집 짜장을 더는 못 먹겠다며 팀을 이탈해 한 번 찾아오더니, 그 뒤 며칠 동안 단골이 되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 벽에 걸어두었어야 했는데, 사인도 겨우 받았다. 우리 부부는 또 그런 건 진짜 못한다. 성격상 못하기도 하고, 연예인이라고 설레발치는 걸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 성격은 어찌 그리 닮았나 모르겠다. 여러모로 장사에는 참 소질이 없다.  

제주시내에서 할 때는 진짜 거물급이 왔었다. 배용준이었다. 일행 셋과 함께 왔는데, 평택에 있을 때 방송된 채널A <먹거리X파일>을 보고 제주 여행 온 김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매니저가 말해주었다. 처음엔 몰라봤다. 서빙하느라 가까이 가서 옆모습을 보면서 예의 그 턱선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면서 눈여겨보았다.

그래도 금세 못 알아봤다. 한참을 생각해서 그가 배용준이 맞다는 걸 알았다. 이번에는 무조건 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보겠다고, 계산하고 나가려는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으나, 거절당했다. 사진 찍히는 걸 안 좋아한다나 어쨌다나. 기껏 작심하고 말을 꺼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니 어찌나 무안하던지, 그 바람에 사인도 못 받고 보내버렸다.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아까워했다. '바보야, 바보!'라는 말도 꼭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장사를 6년씩 8년씩 해도 우리는 장사꾼이 되긴 글렀다.

○ 편집ㅣ손지은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 10월 20일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08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 #자연주의음식 #자연주의짜장면 #마라도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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