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하소동 상량식
우금치
때는 바야흐로 1990년, 극단 운영을 체계적으로 해보겠다고 월급제를 만들고 동거수당, 생리수당, 부모님 생신수당에 이것저것 규약을 만들었다. 지각을 3번 이상하면 월급을 감봉하는 제도까지.
그 당시 막내였던 나는 지각 담당자가 되어 출근 후 몇 분 동안 아주 예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단원들이 늦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버스가 안 와서." "극단 시계랑 내 시계가 안 맞네?" "슈퍼 아저씨가 말을 시켜서." 선배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시선은 하루 종일 따갑고 불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월급 7만5000원에서 지각 한 번에 5000원식 감봉하는 건 살점을 떼어내는 것만큼 쓰라린 일이었다. 6개월 만에 지각 버릇은 고쳐졌고 자연스럽게 감봉제도 폐지됐다. 지금도 지각이 잦을 때면 그 제도를 부활하자고 한다. 지금은 한 5만 원쯤 해야 먹히려나?
하지만 모두 잘해보자고 결정한 일이니 원망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탓할 그 무엇도 없었다. 지금 각자 100만 원씩 내자고 합의하는 것처럼.
산 속에 집짓고 살던 1996년, 주변에서는 자타공인 전국 최초 극단 공동체 생활이라며 미국의 <빵과 인형극단>, 일본의 <천막극단>과 비교하며 파격적 행보에 주변인들은 격려와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돌투성이 산언덕에 시멘트를 비비고 골조를 세워 만든 조립식 건물. 거기서 우리는 6시 기상, 산길조깅, 식사, 청소, 출근, 야간훈련, 공동거실 10시 이후 사용 금지, 연애 시 퇴소, 단원 지인 출입금지, 평일 외박 금지 등을 지키며 살았다.
공동의 생활공간이지만 월세부터 전화 요금, 난방비까지 단체에서 해결하니 꿈같은 복지조건이었다. 단체로 살다보면 먹는 것에 집착이 심해진다. 손님이 오면 손에 든 봉지부터 반겼고 술이나 먹을 것이 남으면 여기저기 숨겨두기 바빴다. 그러다 입이 고플 때 하나씩 보물 내주듯 꺼내오면 그 단원은 순식간에 영웅이 된다.
그때는 왜 그리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는지. 하기야 김장 300포기, 동치미 무 100개, 총각김치 10단씩 해댔으니 "한 사람이 소 한 마리 못 먹어도 열사람이 소 열 마리 먹는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아무튼 젊은 청춘을 산속에서 열정적으로 살았다. 문 열고 나가면 연습실이고 집이니 밤낮없이 연습하고 마음만 먹으면 작품제작도 순식간에 해결됐다. 온통 산이라 소품, 도구제작도 자연에서 해결했다. 보통 1년에 한 작품 만들던 것도 거기선 2~3개도 거뜬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연하고 훈련하면서 10년 만에 빚을 갚았다. 참 엄청난 일을 했던 그 시절, 어쩌면 내가 그만두면 모두 힘들겠지 하는 그놈의 '으~리' 때문에 여태껏 버텨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만두면 나머지는…' 의리로 버텨온 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