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사본
이정환
"옛말에도 있듯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내 선조가 무식했기에, 가난했기에, 그런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 최후 진술서에서 박흥숙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언급한 유일한 대목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 아홉 글자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박흥숙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가정 형편으로 고민하나 자립하려고 노력한다"거나 "마음이 착하고 남에게 동정 받지 않으려 하고 혼자 자립하려 든다" 등의 평가가 눈에 띈다.
자립, 박흥숙도 공부로 자립하고자 했다.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로 박흥숙 역시 공부를 택했다. 그 결과는 영광 중학교 수석 합격. 하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비빌 '언덕'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자신의 심정을 박흥숙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합격자 발표 날 가 보았더니 정말로 꿈에도 그리던 1등 합격이 사실이었다. 정말 눈물이 나왔다. 학교 실력이 나만 못한 애도 학교를 다니고자 교복을 맞추고 야단인데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 학교는 다닐 수 없고 집안은 가난하여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진학은 포기하였고 중학교에서 주는 교과서를 팔아 차비하여 광주 가족에게로 떠나왔다." (박흥숙의 일기장 중에)그래도 박흥숙은 자립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서 점원으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또 덕산골 산등성이에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움막집을 지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박흥숙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낮에는 일을 했으며 밤에는 책을 보았다. 영어 기초나 수학 기초는 완전히 닦은 셈이다.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어머님을 드려 저금을 하여,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집에 가서 독학이라도 해 볼 셈이다...(중략)...약 3개월 공부를 하니까, 코에서는 코피가 터졌고 눈에서는 눈알이 빠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5개월쯤 되자 검정고시에 응시해서 뜻밖에 합격이 되었다. 4천7백73명 중 4백명이 합격했다. 그 중의 하나인 나다. 희망과 용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박흥숙의 일기장 중에)그렇게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박흥숙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광주 동신 중학교. 사법고시 1차 시험에 도전한다. 결과는 낙방, 하지만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정자씨는 "다 좋았는데 영어가 조금 힘들었었다"며 "1, 2년 만 더 공부하면 되겠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박정자씨는 "오빠가 잠을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자면서 공부를 하고 운동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지친 몸으로 누워 박흥숙은 천장을 바라봤을 것이다. 사건 당시 <전남매일신문>은 박흥숙이 살던 집 천장에 그의 글씨로 "노력 없이는 무엇도 이루어질 수 없다. 피눈물나는 고생을 두려워 말라!"는 좌우명이 써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그 날은 1977년 4월 20일이었다.
"그렇게는 못하리라, 그렇게는 명령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