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권을 향한 끝없는 욕망, 베르사유 궁전

[인문학자와 함께하는 말랑말랑 파리여행 ⑦] 베르사유 궁전

등록 2016.03.02 16:53수정 2016.03.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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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김윤주

영화를 만든다면 여섯 살짜리 귀여운 꼬마가 사냥을 처음 배우고 아버지와 함께 들과 숲을 헤매며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1607년, 파리 남서쪽 20km, 베르사유'라는 자막이 한 줄 올라와 주면 더없이 좋겠다. 하늘은 높고 들판은 푸르르며 꼬마의 머리칼과 맑은 얼굴에는 눈부신 햇살이 와 닿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화면이 오버랩 되며 이제는 성인이 된 왕이 부하들을 이끌고 말을 타며 예의 그 들판을 바라다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1623년, 베르사유'라는 자막이 다시 올라오면 되겠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앙리 4세의 아들 루이 13세(Louis XIII, 1601~1643)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추억을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던 왕은 1623년 아버지와 사냥을 즐기던 베르사유 일대를 사들인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시작이다.  


비록 베르사유의 광활한 땅을 사들인 루이 13세의 이야기로부터 영화는 시작하지만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은 그의 아들이다. 1643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일흔 일곱 세상을 떠날 때까지 72년이나 왕좌에 앉아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그것이 영원하기를 탐했던 왕,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했던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이야기이다.

 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 루이 14세 청동 기마상
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 루이 14세 청동 기마상김윤주

급작스레 왕위에 오른 다섯 살 어린 왕을 대신해 실제 국정을 운영한 이는 당시 재상이었던 마자랭(Jules Mazarin, 1602~1661)과 죽은 왕의 부인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스페인 출신 왕비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였다. 섭정이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오랜 적대감으로 왕과 왕비는 서먹한 관계였던 데 반해, 성직자 신분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출신 마자랭은 스페인 출신 왕비의 상담자 역할을 하며 오랜 시간 가까운 사이였다. 심지어 결혼 23년 만이던 1638년, 루이 14세가 태어났을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마자랭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 지경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슬픈 일인데, 궁정파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란인 '프롱드의 난(La Fronde, 1648~1653)'까지 겪으며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루이 14세는 성장해 가면서 귀족에 대한 반감과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절대 저물지 않을 것 같았던 마자랭의 시대가 끝나고 왕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마자랭이 숨겨두었던 개인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 그의 죽음 뒤에 밝혀진 것이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루이 14세는 그동안 자신이 허울뿐인 왕이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국왕의 사냥 별장 수준이었던 베르사유가 절대 왕권의 요지로 변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셈이다.  


 베르사유 궁전, 전쟁 갤러리
베르사유 궁전, 전쟁 갤러리김윤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김윤주

반역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아들조차 믿지 못했던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직접 감시하고 제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모아들이길 원했다. 마자랭이 죽은 1661년 이후로 수십 년간 베르사유의 증축과 확장이 진행된다. 채 공사가 끝나기도 전인 1682년 맘이 급했던 왕은 아예 왕실을 베르사유로 옮기고 행정 수도를 이전한다. 자연스레 파리의 귀족들은 왕궁 근처로 모여들고 도시가 형성된다.

매일매일 빼곡한 왕실 행사를 공개해 귀족들의 참여를 의무화한 것도 그들의 세력을 통제하고 절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묘안이었던 셈이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1715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이곳, 베르사유에 머무르며 절대 왕정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궁전, 왕보다 더 오래 남아 영욕의 역사를 누린 그의 성이 될 수도 있겠다. 어린 세자의 유년기 추억이 서린 드넓은 들판,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궁정 화가, 조경 전문가가 총동원되고 몇 차례의 증축과 확장을 거치며 50년이나 걸려 공들여 완성된 왕실 궁전.

1789년 대혁명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백여 년간 찬란했던 절대 왕정의 중심지로 유럽 모든 왕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곳, 정략결혼으로 모국을 떠나와 사치와 향락으로 가득한 짧은 생을 살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간 비련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호화로운 연회장으로 기억되는 곳, 먼 훗날 파리 코뮌을 무력으로 제압한 제2제정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 그곳, 베르사유 궁전 말이다. 

 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
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김윤주

궁전은 아직 저만치 멀리 있는데, 출입문과 철제 담벼락, 황금빛 화려한 외관에 압도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몸을 돌려 사진기를 눌러댄다. 광장 입구에는 루이 14세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72년이나 왕좌에 앉아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이 왕은 30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 곳곳에서 몰려와 자신의 궁전 앞마당을 가득 채운 이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크고 넓은 돌바닥으로 이루어진 드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 들어가 궁전이 가까워지면 왕의 연대 사열식이 행해지던 대리석으로 된 또 다른 광장이 나온다. 궁전 입구와 매표소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자며 테이블 등 대기실의 실내 장식마저 그럴듯한 앤티크 풍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앞으로 둘러보게 될 궁전의 내부가 어떤 분위기일지 일찌감치 짐작할 수 있다.

궁전만 보는 건 15유로, 마리 앙투아네트 영지는 10유로, 나폴레옹이 집무실로 썼다는 그랑 트리아농도 10유로, 세 군데를 다 보는 건 18유로이다.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것 같아 궁전만 관람하는 15유로 티켓을 끊었다. 딴에는 현명한 선택이라고 자부했지만 나중에 크게 후회를 하고야 말았다. 

입장하자마자 예쁜 부티크가 보인다. 핑크색 일색인데도 조잡하지 않고 고급스럽다. 마치 초대 받은 귀족들이나 드나들법한 분위기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려진 작은 손 비누와 장식용 자석을 샀다. 레이스가 섬세하고 나뭇결이 부드러운 부채가 하도 예뻐 만지작거렸지만 끝내 놓고 나왔다. 1층 안내 데스크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받아들고 발길을 재촉한다. 종일 돌아도 다 못 본다는 곳인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김윤주

 베르사유 궁전, 마르스의 방
베르사유 궁전, 마르스의 방김윤주

왕실 예배당에서 시작해 2층에 오르면 '아파르트망(Appartement)'이라 불리는 수십 개의 방을 지난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왕의 그랑 아파르트망은 7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방은 '헤라클레스, 아폴론, 머큐어, 비너스, 마르스' 등과 같이 태양계 행성의 이름이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이 붙어져 있다.

왕비의 그랑 아파르트망도 왕비의 침실, 도서관 등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방들과 홀을 지나 화려함의 극치인 거울의 방을 본 후, 왕자들의 방 여러 개의 벽을 터서 만든 기다란 홀로 된 전쟁 갤러리까지 다 보고 나면 대강 둘러본다 해도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왕은 이곳에서 매일 오전 8시면 기상 예식을 하고 10시에 예배당에서 미사를 본 후 11시에 대신들을 모아 놓고 국정 자문회의를 한다. 오후 1시면 점심식사를 하고, 식사 후엔 정원 산책이나 사냥을 즐긴다. 오후 6시부터는 늘 파티가 열린다. 오후 10시면 만찬을 즐기고 11시 취침 예식 후 잠자리에 든다. 

이 모든 예식을 위해 궁의 이 방 저 방을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며 분주하게 시중을 드는 조신과 하인들이 적게는 3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에 이르렀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궁정 예식은 매우 엄격한 격식을 갖추고 진행되었는데 매일매일 치러지는 이 예식에서 왕을 누가 가장 가까이서 접견하고 동석하느냐에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곤 하였다. 귀족들은 사치스런 왕에게 선택 받기 위해 의복과 장식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야 했다.

이러한 허례허식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재정을 낭비하느라 나라 살림은 이미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과 성직자는 세금을 내지 않았으니 이 모든 비용은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100여 년 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는 이미 이때부터 지펴지고 있었던 셈이다. 권력과 야욕과 사치와 허영에 눈먼 인간의 우매함은 얼마나 위험하며 그 끝은 어디인가.
#파리 여행 #베르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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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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