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 루이 14세 청동 기마상
김윤주
급작스레 왕위에 오른 다섯 살 어린 왕을 대신해 실제 국정을 운영한 이는 당시 재상이었던 마자랭(Jules Mazarin, 1602~1661)과 죽은 왕의 부인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스페인 출신 왕비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였다. 섭정이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오랜 적대감으로 왕과 왕비는 서먹한 관계였던 데 반해, 성직자 신분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출신 마자랭은 스페인 출신 왕비의 상담자 역할을 하며 오랜 시간 가까운 사이였다. 심지어 결혼 23년 만이던 1638년, 루이 14세가 태어났을 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마자랭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 지경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슬픈 일인데, 궁정파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란인 '프롱드의 난(La Fronde, 1648~1653)'까지 겪으며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루이 14세는 성장해 가면서 귀족에 대한 반감과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절대 저물지 않을 것 같았던 마자랭의 시대가 끝나고 왕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마자랭이 숨겨두었던 개인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 그의 죽음 뒤에 밝혀진 것이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루이 14세는 그동안 자신이 허울뿐인 왕이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국왕의 사냥 별장 수준이었던 베르사유가 절대 왕권의 요지로 변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