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문짝도 없는 숙소... 여행 중 최악이다

인도 반바사 국경에서 네팔로... 국경도시 마헨드라나가르에서 버스 타기

등록 2016.03.21 13:57수정 2016.03.21 13:57
1
원고료로 응원
a

인도 국경도시 반바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숙소. 벽면은 오래된 창고처럼 얼룩이 져 있고 판때기를 올려놓은 침대 위의 얼룩진 이불은 벼룩이 득실거릴 것만 같았다. ⓒ 송성영


곰팡이 냄새가 역겨운 숙소의 벽면은 오래된 창고처럼 얼룩이 져 있고 천장에서 짜그락 짜그락 맥 빠지게 돌아가는 선풍기는 후덥지근한 바람을 뿜어대고 있다. 고물상에서나 볼 수 있는 침대는 엉덩이를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거린다. 판때기 위에 덮어놓은 침대 깔개는 세탁한 지 아주 오래된 듯 얼룩져 벽면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자그마한 창문조차 없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네모반듯한 방안에 모기들까지 왱왱거리고 버스 스탠드 근처, 식당을 겸하고 있는 대로변 숙소라서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인도에서 만난 최악의 숙소다.

인도 네팔 국경도시 반밧사의 5월 하순은 후덥지근한 여름날씨다. 국경 도시답게 꽤 넓게 형성된 반밧사 시장 바닥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여기저기 기웃거린 끝에 잡은 숙소였다. 차라리 침낭을 덮고 배낭을 베개 삼아 노숙을 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온다.


때론 몸이 쌓인 피로감만큼의 떨림으로 신호를 보낸다. 몸의 언어는 떨림이다. 작은 돌멩이 하나로도 큰 파장을 일으키는 호수의 물처럼 눈감고 내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몸이 말을 건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의지대로 몸을 함부로 부려 먹지 말라 이른다. 더 이상 몸을 혹사시키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머물라 한다.

꼬질꼬질한 침대 시트, 벽... 여기가 오늘 숙소라니

꼬질꼬질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배낭처럼 내 몸을 던져놓았다. 그렇게 천장에 달라붙어 짜그락짜그락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몽롱하게 바라보며 한참을 누워 있는데 문득, 지옥이나 다름없는 월남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지옥의 묵시록>(프란시스 포드 코플라 감독의 1979년 작품)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그 영화의 첫 장면, 정글을 폭격하는 헬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도어즈의(The Doors) 노래 'The End'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화염에 뒤덮인 정글과 헬기의 프로펠러가 천장에 달라붙어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로 오버랩 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영화 속의 주인공 '마틴 쉰'이 선풍기 날개를 몽롱하게 바라본다.

나는 몽롱한 기운을 추슬러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문단속조차 할 수 없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끈적끈적한 몸에 물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었는데 공동 샤워장은 고사하고 화장실조차 문짝이 달려 있지 않다.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조차 없다. 물을 받아쓰려면 펌프질을 해야 한다. 펌프질할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등목조차 할 수 없다. 세수 대야도 없어 몇 차례의 펌프질로 땀에 절어 숙소의 이불만큼이나 꼬질꼬질한 얼굴과 목을 씻을 수 있었다.


a

반밧사 버스 스탠드 주변 거리. ⓒ 송성영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고 숙소 주인에게 자물쇠를 요청해 문단속을 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나나 몇 개와 과자로 끼니를 때웠다. 기운을 챙겨 내일 국경을 넘으려면 뭔가를 먹어야 한다. 지친 몸으로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번거롭다. 식당 딸린 숙소였기에 부러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모모나 자오민 됩니까?"
"그런 음식은 없습니다."
"이 부근에 그거 먹을 만한 식당 없습니까?"
"모릅니다."


매몰차게 딱 잘라 대답하는 주인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자신의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히말라야 근처의 국경도시 다르줄라 사람들과는 달리 반밧사의 국경도시 사람들은 숙소만큼이나 불친절하다. 숙소를 잡기 전, 거리의 상점에서 토마토를 샀는데 주인이 골라준 토마토들이 대부분 상해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도 비싼 편이다.

숙소 식당을 빠져나와 버스 스탠드 주변의 적당한 식당에서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어둔 밤거리를 나섰다. 몇몇 외국인 배낭객들이 눈에 띈다. 버스 스탠드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 큰 눈을 끔벅거리며 쪼그려 앉아 있거나 큼직한 가방을 베고 누워 있다. 밤을 여기서 보낼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은 거지들이 아니다.

내가 값싼 숙소를 찾아 시장거리를 헤매고 다닐 때 사람들 앞에 손을 내미는 거지들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세상 어디든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적선을 바라며 손을 내밀 수 없는 곳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매정한 곳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버스 스탠드에서 한뎃잠을 청하고 있는 저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낡은 숙소에서조차 몸을 누일 수 없는 일용노동자들일 것이었다. 불평등한 계급이 자본으로 나눠지는 자본주의 국가가 그렇듯이 인도에서의 불평등한 카스트 제도는 이제 자본으로 그 계급이 나눠지고 있는 듯싶다.

비록 지린내 나는 허름한 숙소지만 내겐 누울 공간이 있다.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저들에게는 자본주의의 미천한 계급장조차 없다. 하지만 내게는 언제든지 먹고 마시고 잠들 수 있는 현금카드, 자본의 계급장이 있다. 잠들 수 있는 나만의 공간과 비워져 있는 배까지 채웠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인가.

쥐벼룩들이 득실득실할 것 같은 나무 판때기 침대 위에 침낭을 깔고 누웠다. 침대는 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거리며 흔들린다. 오늘 하루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절벽 길을 덜컹거리며 내달리는 지프차의 음주 운전자에게 장장 11시간 동안 운명을 떠맡겼다. 다친 무릎의 통증조차 까마득 잊고 있었다.

버스 스탠드 부근의 사원에서 나를 지옥으로 끄잡아 들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전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녹음기를 통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에 마음상태가 점점 뒤틀려 가고 있었다.

성인들이 말씀을 몸으로 행하지 않고 단지 신으로 떠받들며 '신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현생은 악으로 들끓는 지옥이 될 것이다. 그들은 전쟁까지 불사해 가며 수없이 많은 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믿습니다' 한마디로 면죄받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렇게 '믿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정작, 천국가는 길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성인들의 말씀은 믿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경전 소리에 종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떠올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싱거운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드디어 네팔로...

a

반밧사 도심을 벗어난 자전거 릭샤는 네팔 국경을 향해 숲길을 달렸다. ⓒ 송성영


a

숲길을 벗어나자 강줄기 따라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가로수 길이 나왔다. ⓒ 송성영


이른 아침 서둘러 배낭을 꾸려 밖으로 나섰다. 네팔 국경으로 가기위해 요금이 비교적 싼 마차를 알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자전거 릭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릭샤꾼은 나이 많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숲길을 따라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갔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힘들면 쉬어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숲길을 벗어나자 강줄기 따라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가로수 길이 나왔다. 강줄기를 따라 얼마쯤 달려가자 그 끝 지점에 댐이 보였다. 그 앞에 자전거 릭샤가 멈춰 섰다. 여기가 바로 네팔 국경이라는 것이다. 반밧사 도심에서 국경까지는 자전거 릭샤로 대략 20분 거리.

"네팔로 가려면 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인도 출입국 사무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손짓을 한다. 그가 영어로 말하지 않았지만 댐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출입국 사무소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릭샤 요금에서 얼마간의 루피를 더 얹어주고 그의 말에 따라 철제 다리를 건넜다. 다르줄라에서도 그랬듯이 네팔과 인도 사람들이 비자나 여권 따위가 필요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다리를 건너자 인도 출입국 사무소가 나왔다.

a

인도와 네팔을 가로지는 반밧사 국경다리. ⓒ 송성영


a

공사판 임시 사무실처럼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인도 출입국 사무소. ⓒ 송성영


인도 출입국 사무소는 뭔가 그럴듯한 건물에 들어서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공사판의 임시 사무실처럼 낡고 허름했다. 직원도 한 사람 뿐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친절한 미소로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더니 여권을 요구한다. 여권을 건네자 도장을 찍어준다. 내가 짧은 영어로 대답할 수 없는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어 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인도를 빠져나가는 절차는 그게 전부였다.

싱겁기 그지없는 출국 신고를 마치고 나서 사무소 직원의 말에 따라 다시 자전거 릭샤를 잡아탔다. 네팔 출입국 사무소까지 대략 3킬로미터 정도라고 했지만 다친 무릎상태가 좋지 않아 걷기에는 무리였다. 네팔 출입국 사무소 역시 인도 사무소와 다를 바 없었다. 허름한 민가나 다름없는 네팔 사무소에는 두 사람의 직원이 있었다.

a

네팔 출입국 사무소. 여기서 한 달짜리 비자를 받고 미화를 네팔 돈으로 환전했다. ⓒ 송성영


a

긴 가로막 하나 놓여 있는 네팔 국경 검문소. 아파트 경비원 같은 경찰이 지키고 있다. ⓒ 송성영


한동안 인도에서 살다시피했던 동생 말에 따라 배낭 깊숙한 곳에 비상용으로 꼬불쳐 놓은 미화 100달러를 꺼냈다. 1개월짜리 네팔 여행 비자를 미화 42달러로 발급받고 나머지는 네팔 돈으로 환전했다. 동시에 간단한 입국신고서를 작성했다. 영어가 서툴었기에 입국신고서를 대충 기재했다. 젊은 직원이 꼼꼼히 살펴보며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나는 영어를 잘 모릅니다.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을 더 못합니다."

내가 영어를 잘 모른다고 이실직고 했더니 고맙게도 내게 인터뷰하듯 물어 자신이 직접 써 넣는다. 미화 1달러 당 네팔 돈으로 92루피. 환전한 돈을 헤아리는데 계산이 되질 않는다. 숫자 개념에 약한 나는 인도에 온 이래 줄곧 15, '피프틴'(fifteen)과 50, '피프티'(fifty)의 발음을 헷갈려 했다. 물건을 살 때나 버스 요금을 낼 때 15루피를 요구하는데 10 루피짜리 지폐 5장, 50루피를 내줘 손해를 보기도 했다. 양심 바른 사람들은 함박 웃으며 35루피를 되돌려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모른 체했다.

나는 환전한 네팔 루피를 받아들고 잠시 망설였다. 머릿속으로 셈을 했지만 제대로 환전 했는지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지갑에 챙겨 넣고 출입국을 빠져나왔다. 사무소 바로 앞에 기다란 가로막이 놓여 있는 간이 검문소가 보였다. 아파트 경비원 같은 허술한 경찰에게 여권을 내보이자 관심도 없다는듯 그냥 들어가라고 한다. 사람을 검문하는 것이 아니라 차량 통행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팔 출입국 사무소 직원의 말에 따라 검문소 근처에서 릭샤 보다 10배 가까이 요금이 싼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10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포카라 혹은 카트만두로 갈 수 있는 터미널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네팔의 도시는 행정도시 카트만두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설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포카라가 전부였다. 네팔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내게 어디로 갈 것인가 목적지를 물었을 때 나는 무작정 카트만두와 포카라로 대답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디로 갈 겁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a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찬 버스 안. 창밖으로 버스 옆구리에 매달린 젊은 청년이 보인다. ⓒ 송성영


후덥지근한 버스 안은 그야말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콩나물시루처럼 빼꼭하게 들어차 있다. 고개조차 좌우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류장마다에서 사람을 태운다. 마저 타지 못한 사람들은 버스 옆구리며 꽁무니에 매달린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내 배낭의 부피가 미안할 정도다.

자기 자신도 버티기 힘든 틈바구니에서 대여섯 살 정도 먹은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으로 막을 치고 있는 젊은 엄마와 눈길이 마주쳤다. 어린 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고통스러운 몸부림 속에서도 그녀는 내게 빙그레 웃음을 내보인다.

어머니는 자비의 화신이다. 자식을 품에 안은 어머니야말로 온갖 고통을 감내해내는 가장 큰 수행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송가나 염불소리만 요란한 자들, 세 치 혀끝으로 자비심을 남발하는 자들은 자식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자비심에 비하면 발뒤꿈치도 못 따라 온다. 기본적인 계율조차 저버리고 몸뚱어리는 안락에 빠져 있으면서 수행자 혹은 종교지도자라는 이름을 내세워 천당지옥으로 중생을 겁박하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온몸을 옥죄어 오는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저 어머니의 미소 같은 자비심을 품으려면 고통의 강을 건너야 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스스로 고통의 노를 저어나가야만 고통의 강을 건널 수 있다. 고통을 껴안지 않고서는 자비의 강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여기서 내리세요."

내 옆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네팔 사내에게 버스 터미널을 알려달라고 당부해놓았는데 친절한 웃음을 내보이며 말해줬다. 포카라 행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버스 터미널은 출입국사무소에서부터 10분 거리도 채 안됐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내가 내린 곳은 '마헨드라나가르'라는 네팔 국경도시였다.

마헨드라나가르의 버스 터미널 주변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넘쳐 나고 있었다. 길거리의 호객꾼에서부터 건들거리는 라이방 사내에 이르기까지 이리저리 뛰면서 알 수 없는 지역을 외치며 자신들의 버스나 지프차로 모시고 갈 승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사진기에 버스 터미널 풍경을 담고 있는데 아이스크림을 파는 소년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인도 사람들이 그렇듯이 네팔 사람들 역시 사진찍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a

네팔 국경 도시 모헨드라나가르의 버스 스탠드. 아이스크림을 파는 소년이 다가와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 송성영


포카라 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버스 터미널 매표소를 찾아갔다.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네팔 비자를 받아놓고 포카라로 목적지를 삼았지만 딱히 어디를 둘러보고 뭘 할 것인지 정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히말라야 설산, 그 유명한 안나푸르나를 가까이에서 만나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포카라까지 버스로 얼마나 걸립니까?"
"18시간 이상 가야 합니다."

꽤 먼 거리였다. 포카라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그것도 오후 2시에 있다고 한다. 손전화기 시계에 오전 8시 10분이 찍혀 있다. 둘러볼 곳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곳 마헨드라나가르에서 무한정 포카라행 버스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이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포카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산골 마을, 그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거기서 일주일 정도 머물러 네팔을 익히다가 다시 포카라로 떠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 어디에 붙어 있단 말인가. 내가 매표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한 사내가 다가왔다.

"당신은 어느 지역으로 가려고 합니까?"
"아무 마을이나 가고 싶습니다."
"예? 당신은 목적지가 없습니까?"
"포카라로 가려는데 그 중간에서 머물다 가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 입니까?"
"나도 모릅니다."

'나도 모른다'는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에게 손전화기에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현재 위치를 지적해 주자 맞다고 한다. 사내와 함께 구글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매표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뭔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비롯해 어느새 대여섯 명이 나를 에둘러 쌌다. 체크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처음 내게로 다가왔던 사내와 대화를 주고받더니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지역으로 가길 원합니까?"
"도시가 아닌 아주 작은 산골 마을요."
"산골 마을요? 그곳이 어디인데요?"
"나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당신은 어느 마을로 갈 것인지 정해놓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머나 먼 외국에 와서 자신이 갈 곳을 정해놓지 않았다니, 살다보니 별의 별 인간 다 보겠다는 눈빛으로 낄낄거리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제각각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보통 사람들은 가진 척, 잘난 척, 유세 부리는 사람보다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관대하다. 이들 네팔인들 또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내가 만난 네팔의 첫 인상이 그랬다.

a

버스 터미널 매표소. 내 목적지를 정해주기 위해 몰려들었던 네팔 사람들. ⓒ 송성영


도움의 손길들은 서로 합의를 봤는지 내게 '0000'라는 곳이 좋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발음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바브하라?"
"바브하라가 아닙니다."

내가 자신들이 말한 지역명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자 다들 웃는다. 한 사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메모지를 요구한다. 길 잃은 아이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겠다는 표정이다. 사내는 내가 건넨 메모지에 알 수 없는 네팔어로 지명을 적어주었다. 나는 메모지를 받아들고 다짐을 놓듯 재차 물었다.

"이곳은 숲이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 맞습니까?
"예 당신이 원하는 그런 마을입니다. 바. 르. 디. 아."
"아, 바르디아!"
"맞습니다."

그가 또박또박 읽어 준 '바르디아'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차해 있는 버스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헤이 한국친구!"

지명을 적어 준 사내였다. 사내가 손짓을 하며 저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한다. 바르디아로 가는 버스가 곧장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가 손짓한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잠시후 대여섯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메모를 적어준 사내와 함께 매표소 앞에서 만난 몇몇이 내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보낸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버스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르디아라는 낯선 마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제 버스에 모든 것을 떠맡기면 된다. 버스가 가는대로 가다가 운전기사나 차장이 내리라고 하면 내리면 된다. 그런 마음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이 든다. 그렇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겁게 눌려있던 존재감이 차장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벼워져 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네팔 여행기는 지난해 8800여 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해인 2014년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까지 20일간의 기록입니다.
#반밧사 숙소 #반밧사 국경가는 길 #네팔 비자 #마헨드라나가르 #바르디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2. 2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3. 3 [단독] '윤석열 문고리' 강의구 부속실장, 'VIP격노' 당일 임기훈과 집중 통화
  4. 4 23만명 동의 윤 대통령 탄핵안, 법사위로 넘어갔다
  5. 5 이시원 걸면 윤석열 또 걸고... 분 단위로 전화 '외압의 그날' 흔적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