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국땅에서 반갑게 만난 내 이름 석 자
한성은
또 다른 길을 가고 싶어내 속에 다른 날 찾아 저 세상의 끝엔 뭐가 있는지더 멀리 오를 거야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진 않아- 임상아, '뮤지컬' 가사 중에서"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착륙합니다. 땡큐."
기장의 안내방송에 잠에서 깨어나 비행기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이스탄불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건가. 그리고 창가에 물방울들이 있다. 비가 오나? 뭔가 익숙한 장면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착륙을 하기 위해 하강하던 비행기가 요동을 친다. 위, 간, 폐, 소장, 대장, 십이지장이 모두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롭게 떠다닌다. 나는 이 느낌이 너무 싫어서 바이킹도, 롤러코스터도 타지 않는다. 내 꿈이 파일럿이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비행기는 언제나처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심하게 착륙을 한다. 얄밉다. 알마티에서도 그랬고 이스탄불까지 도착하는 도시마다 공항에서 비가 내린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는 우사와 풍백을 데리고 다니는 환웅인가. 한국은 폭염 주의보라던데 메마른 대지를 적시러 가야겠다. (이후로도 도시를 이동할 때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고 머리야. 당분간은 메이저 항공사를 이용할 계획도, 예산도 없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먹고 마시기를 실컷 하고 잤더니 무려 숙취가 느껴진다. 과유불급이라. 간단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누군가 내 이름을 써서 들고 있다. 숙소에 예약해 둔 픽업 서비스였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내 이름이 적힌 손팻말은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지역을 이동한다면 반드시 숙소를 예약하고 픽업 서비스를 신청할 것.'여행 경비를 아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세워둔 원칙이었다. 이스탄불에서는 마침 원룸형 아파트가 저렴하게 나온 게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3일을 예약해 두었었다. 호스트 이름이 사반(Saban)이라 피켓을 들고 있던 청년에게 "네가 싸반이야? 안녕!" 했더니 자기는 사반이 아니고 사반은 자기 보스라고 했다.
'아... 기업형으로 운영하는 호스트였구나. 뭐 어때 저렴하기만 하면 되지.' 두려움과 낯섦과 설렘이 범벅된 터키 여행
공항 밖으로 나가니 한국전쟁 중 영도다리 밑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것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손님을 태우려고 기다리는 차들과 기다리는 차에 타려는 여행객,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택시 기사의 외침, 그리고 일정한 박자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외치는 호객꾼들의 소리에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더해지니 정신이 혼미했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길 잘했다. 나를 기다리던 승합차에 올라탔다. 기사분이 반갑게 맞아주고 짐도 실어 준다. "안녕 싸반!" 했더니 역시나 자기는 사반이 아니고 사반은 자기 보스라고 했다. 음... 사반을 찾아라. 인사라도 해보자.
사실 인터넷으로 숙소를 예약하면서 픽업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25유로를 달라고 해서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너무 비싸서 못 타겠다고 깎아 달라고 메일을 보냈었다. 물론 안된다고 하면 마음속으로 맹비난을 좀 하고 그대로 예약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문제 없어(No problem)'이라고 답장이 왔다. 터키 여행은 터키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지내는 동안 제대로 된 흥정이란 걸 할 일이 없었다. 딱 한 번 택시를 탈 때 "얼마에요?"라고 물어본 정도가 전부였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도 모든 제품에 손글씨로 물건값이 써 있었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디든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관광지로 가는구나, 정신 차려야지~!'라고 다짐했으나, 물론 첫날부터 다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숙소에 밤늦게 도착한 탓이기도 하지만, 좁고 어두운 골목에 드문드문 불을 밝힌 가게들이 낯설어서 도착한 날에는 조용히 숙소에서 짐 정리만 했다. 스스로 세워둔 두 번째 원칙이 있다. '도시를 이동한 첫날에는 가능하면 돈을 쓰지 말 것'. 결국 여행객과 관련한 사고 대부분은 돈과 관련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다니며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침대에 누웠는데 '아~ 아아~' 하는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자미(이슬람 사원)에서 스피커를 통해 내는 기도 소리였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낯선 냄새와 을씨년스럽게 들리는 낯선 기도 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곧 익숙해지겠지. 그래야만 한다.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
새벽부터 온 동네를 깨우는 기도 소리에 잠이 깼다. 이 소리가 어느새 익숙해졌나 보다. "인제 그만 일어나~ 게으른 한량 여행객이여~" 하는 소리로 들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간다. 이스탄불 최대의 재래시장이라는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로 향한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아침잠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숙소 주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아! 일요일이었구나... 요일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고 다니고 있다.
무슬림들은 일요일(성스러운 금요일)을 매주 잘 지키기 때문에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서양력으로 금요일인지 일요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계 3대 종교인데 참 모르는 것이 많다. 아니, 아는 것이 없다. 미디어에서는 언제나 잔혹한 면만을 부각하여 보여주니 히잡과 차도르는 그저 공포의 상징으로만 다가온다. 여행 전에 읽었던 터키 관련 서적에서 터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른 무슬림 국가들 보다 조금 개방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낯섦에 대한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선다.
"이것도 먹어볼래?" 순진하게 호의인 줄 알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