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마, 끝까지 걷기만 하는 소설들

[김성호의 독서만세 90] <밤의 피크닉>, <로드>, <롱 워크>

등록 2016.07.04 16:20수정 2020.12.2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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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은 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다가도 십자인대가 끊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그로부터 계획했던 많은 것들이 깨져나가고 '설상가상'이며 '엎친 데 덮친 격'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실감하게 되도 다시 일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 앞에서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감당하는 것뿐이다.

소설에 대리만족 기능이 있다는 건 정말인 모양이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요즘, 나는 소설 내내 끊임없이 걷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한여름 입맛이 없을 때 새콤한 것이 당기는 것처럼 자연히 그런 것들이 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읽은 책 세 권을 소개한다. 각기 일본과 미국의 이름난 작가가 쓴 소설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끝이 안 보이는 길을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뗀다. 저마다 처한 상황도, 걷는 이유도 다르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길 가운데서 나름의 답을 구하고 또 찾는다.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이 흘렀다. 지나간 시간 동안 모두가 때로는 바쁘게, 때로는 여유를 갖고 각자의 길을 걸었으리라. 하지만 아직도 길은 반이나 남았다. 어쩌다 예기치 못한 이유로 걷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여기 세 편의 소설이 당신의 조급함을 달래줄지 모른다. 한 번 믿어봐도 좋겠다.

온다 리쿠, <밤의 피크닉>

밤의 피크닉 책 표지
밤의 피크닉책 표지북폴리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과 함께 일본 장르문학의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는 온다 리쿠.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점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밤의 피크닉>이다.

주로 미스터리, 판타지, 공포 등의 장르에서 꾸준한 활동을 해왔지만 그녀에겐 늘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는 유연한 작가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거기엔 이 소설의 영향이 적지 않다.


<밤의 피크닉>은 온다 리쿠의 작품 가운데는 드물게도 고등학생들의 빛나는 한때를 그린 청춘소설이다.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만 24시간 동안 펼쳐지는 보행제를 배경으로 박동하는 청춘의 성장을 그렸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 깊이 감춰진 비밀이 차츰 표면 위로 떠오르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밀의 극복을 통해 주인공들이 한층 성숙하게 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보행제는 남녀공학인 북고 학생들이 1년에 한 번 참가하는 행사다. 오전 8시 다같이 교문을 나서 정해진 장소까지 갔다가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다시 돌아오면 되는 행사다.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밤샘행군을 떠올릴 보행제로부터 작가는 주인공들 사이에 공유되는 어떤 정체성, 나아가 화학작용과도 같은 변화의 순간을 발견한다.

친한 아이들끼리 24시간 줄지어 왕복 수십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을 뿐인 보행제가 일으키는 놀라운 변화,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온다 리쿠가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곁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 할 힘도 없고 주변의 경치를 살필 여유도 없어지는 바로 그때, 더욱 특별해지는 청춘의 한 순간이 있다. 같은 반이면서도 일년 동안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던 도오루와 다카코가 함께 걸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런 순간이 있었던 덕분이다.

바르게 정돈되고 안정된 어른스러운 모습으론 결코 경험할 수 없을 청춘의 관계맺음, 때로는 치익치익 불타오르고 때로는 깊이 침잠해 무너져내려도 청춘이니까 괜찮다고, 그것이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문제들, 이불을 차게 만드는 창피했던 기억들. 그 모두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아직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청춘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봐도 좋겠다.

교훈 하나. 역시 고교생활은 남녀공학에서 해야 한다. 남학교였다면 제목이 <밤의 피크닉> 대신 <밤의 행군>이 되었을 것이다.

어른들의 사회라는 것은 이상하다. 누구나 입만 열면 훌륭하고 바른 말이 튀어나온다. 일견 대단히 엄격한 룰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에서는 상당히 엉망진창이며 칠칠맞지 못하다는 것은, 신문과 뉴스를 보면 이내 알 수 있다. - 208쪽

하지만 말이야, 잡음 역시 너를 만들고 있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어. - 279쪽


코맥 매카시, <로드>

로드 책 표지
로드책 표지문학동네
모든 고유명사가 사라진 흑백의 세계를, 오직 살아남으려는 원초적인 욕구에 의해 길을 따라 걷는 한 부자의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 <로드>.

고통과 두려움만이 가득해 보이는 파멸 이후의 세계에 아직 어린 아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부성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원초적인 죄책감에 가까울 듯하다.

파멸과 재앙, 그 자체보다 그 이후 생명력을 잃어버린 흑백의 세계를 그려낸 코맥 매카시의 상상력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와 울림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이어지는 여정 내내 간신히 버텨낼 뿐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었던 이들 부자에게 닥친 마지막 희망은 이 식어버린 흑백 속의 따스한 색채로 인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소설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들과 서로를 약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애쓰는 선한 부자를 그린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있어 살아낼 수 있었던 그들.

혼자가 아니기에, 지키고 돌봐야 할 타인이 있기에, 그 미약하면서도 거대한 체온이 있어 이 식어버린 지구에서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진지하고 담담한 드라마는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 때문인지, 작품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 베스트셀러치고는 대중 일반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파괴된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문법까지 의도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추가로 소설 속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로 읽혔던, 아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던 장면은 각별히 인상적이었다.

스티븐 킹, <롱 워크>

롱 워크 책 표지
롱 워크책 표지황금가지
백명의 소년이 끝도 없이 걷는다. 곁에는 트럭에 탄 군인들이 소년들을 감시하고 섰다. 걸음이 일정 속도 이하로 느려지면 가차없이 경고가 날아든다.

세 차례 경고 후엔 총탄이 날아와 박힌다. 행진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 끝난다. 아흔아홉의 죽음 뒤에 홀로 선 하나는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다. 행진의 이름은 롱 워크, 소설 속 미국 최대의 스포츠다.

<롱 워크>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10대 시절 완성한 첫 장편소설이다. 독재국가가 된 가상의 미국에서 열리는 역시 가상의 스포츠 롱 워크를 배경으로 한다.

경기에 참가한 백명의 소년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끝도 없이 걷는다. 식사도 생리현상도 걸으며 해결해야 하는 가혹한 경기지만 거리엔 피의 축제에 환호를 올리는 군중들로 가득하다.

각기 다른 이유로,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롱 워크에 나선 소년들. 소설은 이들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최후의 한 명이 되거나 총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레이스로부터 아직 10대였던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한 건 무엇이었을까.

<롱 워크>는 여러모로 <배틀로얄>과 <헝거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살아남기 극단적인 경쟁을 벌이는 십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롱 워크>가 1966년 완성된 작품이니 이들보다 한참 선배격이다.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자아, 리처드 바크만의 작품으로 출간됐다.
8번 규칙: 동료 워커들에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5


#김성호의 독서만세 #밤의 피크닉 #로드 #롱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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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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