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정말 재밌다는 장 할머니
강은경
건너편에서 장 할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 할머니는 터진 토마토를 따버리며 연신 혀를 차셨다. 그리고 채 1시간도 안 돼 25kg짜리 박스를 다 채우셨다. 나는 그때까지 절반이나 땄나?
"할머니, 언제부터 토마토 따셨어요?""작년부터. 이맘 때 시작해 추석 지나도록 땄지.""힘들지 않으세요?""힘들긴 무슨. 재미지지."실은 나도 그랬다. 토마토 따는 재미에 푹 파져버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땀이 차올라 가슴팍과 등짝이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마을 방송이 들려올 때에서야 비로소 내가 폭염의 날씨에 비닐하우스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오늘 폭염주의보가 내렸으니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는 외출을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장 할머니가 수레를 밀며 앞으로 나가셨다. 또 한 박스를 채운 것이다. 벌써 시간이 또 1시간 지났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장 할머니. 도시에서 살다가 6년 전인가 7년 전에 마천으로 오셨다는데.
"내가 제철공장 다닌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어. 새벽에는 역전 다방에 나가 청소하고... 끝이 안 보이게 큰 다방이었지... 낮에는 식당에 나가 일하고, 또 저녁때는 호프 집에 나갔지. 틈틈이 철이랑 폐지도 줍고..."장 할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다섯 자녀를 키웠다. 고향인 함양에 3층짜리 건물도 올렸다. 세입자들에게서 셋돈만 다달이... 알고 보니 부자(?) 할머니셨다. 나는 부지런히 토마토를 따며, 틈틈이 모기에 엉덩이를 뜯기며,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일 좀 그만 하라고 자식들도 남편도 성화지만, 나는 일이 정말 재밌어... 어디나 일은 쎄고 쎘어. 돈이 깔렸다니까... 왜 도둑놈들이 도둑질하면서 힘들 게 사는지 나는 이해가 안 돼... 그게 뭐 쉽게 돈을 버는 일이야? 들킬까봐 잡힐까봐 조마조마할 텐데, 얼마나 힘들겠어... 올 봄에는 며칠 동안 다래순이랑 뽕나무 잎 따서 200만 원 벌었지... 그래, 내년 봄에는 나랑 같이 다래순 따러 가자고. 없어서 못 팔아..." "할머니, 다시 태어나셔도 또 그렇게 살고 싶으세요?""그러지! 나는 일 하는 것도 재밌고, 돈 버는 것도 재밌고..."장 할머니의 대답은 내 짐작과 어긋났다. 평생 하신 고생을 한탄하지 않으실까, 후회하지 않으실까 싶어서 물었는데. 얕은 생각이었다.
9시쯤 됐나. 은옥씨가 참 먹으러 나오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너 가지 간단한 밑반찬에 밥을 후딱 떴다. 얼음물을 들이키며. 그리고는 소금과 포도당을 정제해 만들었다는 하얀 알약 두 개를 받아먹었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꼭 먹어야 한다니. 밥 숟가락 놓자마자 곧바로 또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는 '토마토 따기'에 홀렸다. 한 여름 비닐하우스 속으로 들어서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그 빛깔 곱고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열매를 '톡, 톡, 톡...' 따는 느낌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손맛이랄까?
좀 부풀려 말하자면, 마치 허공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보석을 줍는 기분이랄까? 내가 직접 몇 달 동안 공들여 지은 농산물을 수확하는 것 마냥 뿌듯하기도 하고. 농사짓는 맛이 이런 걸까?
문득, 정원씨랑 소영씨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5월 말, 지리산 내 집에 찾아온 둘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농사' 일부터 물었다.
"누나, 올해 모내기 했다고요? 논을 빌린 거예요? 어디예요?""거기, 정원씨 발 옆에.""엥? 뭐예요?"정원씨가 헛웃음을 쳤다. '장난해요?'라는 말을 애써 삼키듯 딱 속았다는 표정으로. 나는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한 술 더 떴다.
"그래 봬도 친환경농법으로 짓는 농사예요. 우렁이로. 첫 농사인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