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해프닝, 대대장 앞에 엎드린 소대장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Ⅰ부 초록색 견장 (8)

등록 2016.09.12 09:35수정 2016.09.1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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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삼각팬티


소대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이 지날 무렵 어느 날, 일석점호 시간이었다. 그날 일석 점호의 중점 점검 사항은 위생검사로 정한 뒤, 손발 청결상태와 내의검사를 실시했다. 점호 시간 침상에 일렬로 나란히 선 소대원들 앞에서 내무반장의 인원 보고를 받은 뒤 일제히 요대를 풀게 한 다음 바지를 내리게 했다. 팬티와 내의의 청결 상태를 점검하는데, 3분대장 장 하사가 빨간 삼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는 평소 입담이 매우 좋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단기하사(물 하사라고도 함)였다.

"장 하사! 이게 뭐야! "
"가시나 빤스를 입으면 기분도 째지고, 노름할 때 끗발도 잘 오른다 아임니껴."

"어디서 구했나?"
"휴가 때 매미집(술집)에서 슬쩍 했심더."

그 말에 내무반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에 외출·외박이 없는 내무생활에 빚어진 웃음거리였다.

그렇게 소대원들과 동고동락하며 격일제 당직과 QRF(5분대기조) 소대장으로 소대원들이 흔히 하는 푸념처럼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빴다.


부임 석 달이 지난 무렵 어느 날 한밤 중에 부대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부대이동은 1급 비밀이고, 이동에 따른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상급부대의 관행으로 보였다.

이튿날 아침 근무조가 철수하는 즉시 짐을 꾸렸다. 중대장은 개인 사물은 배낭에 담아 트럭에 싣게 했고, 우리 소대는 행군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중대장이 상황판 지도에 점지해준 새 부대는 원당 역 부근 야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였다.
 
물거품이 된 파견 근무


우리 소대가 완전군장으로 막 부대를 벗어나는데 중대본부는 트럭을 타고 우리 행군 대열을 앞질러 갔다. 소대원들은 사라지는 트럭을 보고, 한 마디씩 불평을 쏟았다. 우리 소대가 헉헉대며 원당 새 부대에 도착하자, 그새 화기소대도 트럭을 타고 이미 도착해 있었다. 더욱이 나를 화내게 했던 것은 1소대는 또 한양컨트리골프장 경비소대로 파견을 나갔고, 또 송추에 파견 나간 3소대는 그대로 머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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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 향도 안 하사(오른쪽)와 소대 내무반 앞에서(1969. 10.). 그는 단기하사였지만 통솔력이 매우 뛰어났다. ⓒ 박도

"소대장님, 제 말이 맞았지요."

그런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안 하사가 내게 항의하듯 말했다. 나도 화가 나서 중대장에게 가서 따졌다. 그 자리에는 화기소대 박한진 소대장도 함께 있었다.

"중대장님, 이건 기회 균등에 어긋납니다."
"모든 건 대대장님 지시였소."

그는 1, 3소대 파견근무 명령을 대대장에게 미루면서 나의 화살을 피해갔다. 그러면서 화제를 바꾸려는 양 얼른 선심 쓰듯 내게 말했다.

"2소대는 영구 막사를 쓰시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화기소대장 박한진 소위는 자기 소대가 트럭을 타고 온 게 미안했는지 흔쾌히 영구 막사를 나에게 양보했다. 화기소대는 이미 24인용 텐트 막사에 입주해 있었다.

나는 중대장의 불공정한 처신에는 한편 화가 났지만 박 소위의 양보에는 고마웠다. 그마저도 양보를 받지 못했다면 소대원을 달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박한진 소위와는 제대 후 오래도록 유대를 이어 왔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간곡히 일렀다.

"기다리자. 그러면 우리 소대도 언젠가 파견 나갈 날이 올 것이다."

그러자 장 하사가 대꾸했다.

"소대장님요,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지 마시고 한 번 치받아 뿌리이소. 강철 중대장님이 있는 한은 우리 소대 파견은 텄심더."

그의 말에 여러 소대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기다려 보자고.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 올지도."
"하긴 오래 살면 시에미 죽는 날도 있다캅디더."

나의 말에 장 하사가 다시 대꾸하자 소대원들은 허탈하게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짜증나는 자대교육

원당 부대는 교외선 원릉역과 가까운 곳으로 지금의 원당초등학교 부근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일대에는 민가가 거의 없는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진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잠복초소를 몇 군데 운영했지만 규모는 작았다. 그에 반비례로 대신 자대교육은 몹시 강화됐다. 자대교육은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새로운 내용보다 늘 반복교육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루 중대장이 대대 중대장회의에 참석하고 온 뒤 두 소대장들을 집합시켰다. 그날 회의 소집 요지는 대대 내 자체교육 강화책 전달이었다. 이는 곧 각 중대별로 공용화기 집체교육을 실시키로 한 바, 우리 중대는 3.5인치 로켓트포를 맡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중대는 LMG 기관총, 또 어느 중대는 박격포, 또 어느 중대는 57미리무반동총을 배당받았다는 것이다. 각 중대 공용화기 사수 조수는 교육기간 중 해당 중대로 파견된다고 했다.

그날 회의의 난제인 교관 선정 문제는 지난 번 막사 양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내가 화끈하게 우리 대대 3.5인치 로켓트포 교관을 자원했다. 그러자 중대장은 일주일 내로 교장(敎場) 완료 및 시강(示講, 시범 강의) 준비를 끝내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후 대대장이 각 교육장을 돌며 교장 준비 상황과 교관들의 시강을 직접 듣는다고 전했다.

중대장은 지시 명령만 내렸을 뿐, 어떻게 준비하라는 세부지시 사항도, 거기에 따른 예산배정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 그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명령이나 지시는 그야 말로 졸병들이 흔히들 하는 말 '뭐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것이었다. 

나는 소대로 돌아온 뒤 소대 간부들과 이를 상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교안 작성과 강의준비만 신경 쓰고, 나머지 일은 자기들이 알서서 할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마침 그 무렵 경기공전을 졸업한 김선진 이병이 우리 소대로 전입해 온 바, 그는 차트 글씨를 잘 쓴다고 했다. 나는 백지 전지를 사다가 그에게 교안과 함께 건네며 차트 일을 맡겼다. 그런 뒤 옆에서 지켜보니까 글씨가 반듯한 차트글씨체로 솔직히 나보다 훨씬 더 잘 썼다.

외출 허락이 몰고 온 파문

야외 교장 작업은 향도 안 하사에게 전적으로 맡기면서 야산에서 곧은 나무 몇 그루를 잘라다가 교안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엉성하게 만들었다가는 시강 때 대대장님한테 조인트 까질 겁니다. 우리 대대장님 성질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알아서 차질 없이 준비할 테니 나는 시강준비나 잘하라고 다시 안심시켰다. 그 며칠 후 내 당직날 밤이었다. 안 하사는 소대원 세 명을 데리고 내게 와서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낮에 원당 쪽으로 순찰 나가다가 널빤지를 파는 곳을 알아뒀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두 차례나 교안대는 야전 교육장답게 원목을 잘라 만들라고 지시했으나, 그는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세 명과 함께 외출 준비를 다한 뒤 부득부득 나에게 외출 승낙을 강요했다. 나는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나머지 교장 작업도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만 그의 외출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쯤 지날 무렵으로 야음이 깊어 언저리는 칠흑이었다. 그때 위병소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근무 중, 이상 무!"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비상등을 켠 지프차가 중대 연병장으로 돌진해 왔다. 나는 중대 상황실에 후다닥 연병장으로 뛰어나갔다. 지프차에서 대대장이 내렸다.

"야, 일직 사관!"
"네!"

나는 크게 대답하고 대대장 앞으로 달려갔다.

"공격! 근무 중 이상무!"
"뭐? 근무 중 이상 없다고?"

"네! 이상 없습니다."
"잔류 병력, 이상 있나 없나?"

"이상 없습니다."
"다시 묻겠다. 잔류 병력, 이상 있나 없나?"

"이상 없습니다."
"이 새끼가 정말?"

곧 대대장 군화발이 내 정강이를 걷어찰 기세였다. 나는 그 순간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마음속으로 직감했다. 일이 터질 때는 솔직한 게 얘기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상 있습니다. 소대원 네 명 외출을 허락했습니다."

소대원 대신 엎드리다

그새 중대장도 BOQ에서 달려왔다. 곧 안 하사를 비롯한 네 명은 헐레벌떡 구보로 귀대했다. 모두 중대 상황실 램프 등 아래로 갔다. 대대장이 말했다.

"이 자식들이 마치 꿩 잡는 포수처럼 총을 비스듬히 멘 채 대로를 활보하고 가기에 내가 차를 세우고 어디 가느냐고 묻자 순찰 간다고 하잖아. 이 놈들 순찰 가는 복장이나 태도가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곧장 부대로 돌아가게 한 다음, 여기로 바로 온 거야."

나는 그들에게 외출을 허락한 자초지종을 대대장에게 솔직히 말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대대장은 소대원 네 명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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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인치 로포 교관시절, 교육 중 10분간 휴식시간에 다른 중대에서 파견 온 교육병(왼쪽)과 함께 야외교육장에서 기념촬영을 하다. 그는 김 아무개 일병으로 경북 선산군 무을면(현, 구미시 무을면) 출신이라고 했다. ⓒ 박도



"야, 전부 엎드려!"


그러자 네 명은 중대 행정반 바닥에 나란히 엎드렸다. 대대장은 안 하사가 멘 CAR(캘빈) 소총을 거꾸로 치켜들더니 곧 그들 엉덩이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얼른 네 명을 일으켜 세운 뒤 그 자리에 대신 내가 재빠르게 엎드렸다. 그런 뒤 나는 대대장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대대장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대신 저를 쳐 주십시오."

대대장은 총구를 잡은 채 한참 나를 노려보더니 슬그머니 총을 내렸다. 그리고는 네 명에게 소리쳤다.

"야, 너희들은 돌아가!"

그들이 막사로 돌아가자 대대장이 나에게 말했다.
                                                   
"야, 박 소위! 일어나."

내가 벌떡 일어나자 대대장은 아무 말 없이 지프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내가 상황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가자 그들 네 명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내무반 어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대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솔직히 그 핑계대고 주막에 가서 한 잔 꺾으려다가 하필이면 대대장에게 된통 걸렸습니다."
"그만 됐어. 어서들 자라고. 밤이 늦었어."

이튿날 중대 병기계와 함께 무기고로 가자 수류탄을 담은 나무상자가 있었다. 그 상자를 하나 얻어 그 널빤지로 교안대를 만들게 했다. 그 일로 한동안 '줄빠따' 문제 때문에 서먹했던 안 하사와 나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 다음 글에 계속)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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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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