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소대본부 인원이다(앞줄 왼쪽부터 향도 안 하사, 신임 기재계 김학수 일병 전령 오 이병 뒷줄 왼쪽부터 기재계 김덕중 병장, 기자, 소대선임하사 박영삼 중사. 1969. 10.)
박도
1969년 6월 하순, 내가 보병 제26사단 보충대에서 실무교육을 받을 때였다. 사단의 한 참모는 부대현황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단에는 한양컨트리골프장 경비소대도 있다고 하여, 동기생들이 그곳 파견근무를 매우 동경한 적이 있었다.
부대이동을 하자 그 골프장 경비소대가 바로 우리 중대 관할이었다. 그런데 1소대가 지난번 진관사 들머리 부대에서도 비봉 파견 근무를 한 데 이어, 이번에도 골프장경비소대로 파견을 나갔다.
내가 중대장에게 이를 불공정한 처사라고 따지자, 그는 대대장의 지시라고 슬그머니 화살을 피해갔다.
하지만 우리 소대 내무반장을 비롯한 소대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1소대장과 중대장은 같은 간보 출신의 선후배 사이인데다가, 평소 1소대장의 잦은 상납 결과라고 쑥덕거리며 나의 다부지지 못한 처신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원당 부대로 이동한 뒤에도 우리 2소대는 계속 중대본부에 남아 경계근무와 교육을 오지게 받고 있었다.
마침내 파견 소대장이 되다그런 가운데 대대 공용화기 집체교육이 끝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중대장은 1, 2소대 파견교체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에 우리 소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소대는 즉각 관물과 사물들을 지참하고 중대에서 4km가량 떨어진 한양컨트리골프장 옆 경비소대로 이동했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자 1소대는 풀이 죽은 채 소대선임하사인 송 중사 인솔로 중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1소대장 한 소위가 보이지 않았다. 내무반장 안 하사가 1소대 송 중사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왔다. 한 소위는 전날 후방부대로 전출명령이 나서 이미 그쪽으로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소대 교체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그 진상인즉, 1소대장 한 소위가 대민사고를 저질렀다. 경비소대 언저리에 사는 아가씨를 강압적으로 자기 BOQ에 데려다 성폭행을 했는데, 그 아가씨 동생까지도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 부모가 헌병대에 진정을 넣어 한 소위는 연행 수감된 뒤 피해자와 합의를 보자 석방 즉시 후방으로 곧장 전출시킨 모양이었다.
그 이전에도 한 소위는 알코올 중독자로 매끼마다 막걸리 한 사발을 든 뒤에야 밥숟갈을 든다는 얘기가 돌았다. 게다가 그는 걸핏하면 소대원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강철 중대장은 그를 끝내 자기 후배라고 끼고 돌면서 수시로 특혜 파견에 따르는 상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진상을 알고 나니까 씁쓸했지만 그래도 묵묵히 기다린 보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 하사는 입을 함박처럼 벌이며 한 마디했다.
"오래 살다보면 시에미 구정물통에 빠져 죽는 것도 본다고 하더니, 참말로 그 말이 맞네예." "야, 너무 좋아하지 말아.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게 인생이니까.""알았심더. 입을 암만 다물라 케도 벌어지는 걸 우얍니껴." 쌀밥 급식파견 소대장은 부대운영에 권한은 많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막중하기 마련이다. 나는 부대이동 후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키고 단단히 교육시켰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경계근무는 철저히 서고, 교육도 정한 시간에 철저히 할 것이다. 근무나 교육 외 자유시간은 철저히 보장하겠다. 특히 위생관념에 철저히 하고, 군복은 자주 빨아 입을 것이며, 겉옷은 풀을 먹인 다음 다림질해서 폼나게 입는다."이후 소대원들은 그 지시를 잘 따라 주었다. 소대 연병장에 배구 코트를 만들어 거의 매일 여가 시간에는 분대별로 배구대회를 열었다. 배구장 네트는 새끼줄로 엮었고 그 네트를 다는 기둥은 서까래를 구해다 세웠다.
어느 하루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는 골프장 캐디가 소대연병장에다 쪽지를 던지고 갔다. 그 쪽지에는 부대가 바뀌고 난 뒤 군인들이 말쑥해졌다는 사연과 함께 자기들을 향한 군인들의 유치한 야유도 훨씬 줄어들었다고 썼다. 나는 그 쪽지를 소대원에게 낭독한 뒤 골프장 캐디를 향한 유치한 야유는 더욱 자제케 했다. 그 말에 소대원들은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여기 가시나들은 금테 둘렀나. 머스마들이 가시나 보고 좋다하는 히야까시(희롱) 정도는 어데나 다 있는 게 아이가?""장 하사님! 여기 캐디들은 높은 사람만 상대해서 우리같은 깡통계급장들은 쳐다보지도 않은께 괜히 헛물 켜지 마시오."당시 한양컨트리골프장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들이 자주 들나들었다. 그래서 골프장 외곽에 경비소대까지 생겼던 것이다.
부대이동 후 기재계는 소대원들이 배불리 먹어도 1종(쌀)이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매끼마다 쌀 배합 비율을 높이고, 보리쌀은 줄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혼식을 하지 말고, 쌀만으로 밥을 짓게 했다. 당시 기재계는 송탄 쑥고개 출신의 김덕중 병장이 맡고 있었다. 소대 기재계는 군 편제상 공식적인 직명은 없지만 일종의 소대 서무병으로 소대 행정, 보급, 근무자 명단 작성 등 모든 행정을 최일선에서 집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그의 부하가 되고 싶다그 무렵 김 병장은 제대말년이었다. 소대 선임하사 박 중사는 그 후임으로 나의 고교 동기동창인 김학수 일병을 기재계로 추천했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