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머리카락이 '쭈뼛'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Ⅰ부 초록색 견장 (10)

등록 2016.09.19 16:12수정 2016.09.1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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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리


얼마 전 경기도 파주에 있는 한 출판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 이르자 그 일대에는 전국 유명출판사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출판대단지로 변해 있었다.

세월무상으로 내가 군복무를 할 당시에는 그 일대가 서부전선 최전방지대로 아주 궁벽한 농촌이었다. 그런 궁벽한 시골이 그새 40여 년 동안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로 변해 있었기에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껌벅거렸다.

한강 하류 북쪽 건너편은 북한 땅 경기도 개풍과 장단으로 강둑에 오르면 빤히 보였다. 그곳은 분단 이후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남한으로 침투하기 가장 용이한 지역이라고 했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밀물 때 고무보트를 타고 아군 지역을 자기네 안방처럼 드나든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날 간첩 및 무장공비 침투가 매우 잦았던 곳으로, 우리 군에서는 주야로 그 일대 경계를 매우 철저히 했던 위험한 접적지역이었다.

나는 그곳 한강 하류 심학산 아래 산남리부대에서 1969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약 8개월간 오지게 근무했던, 그래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 탓인지 그 시절을 배경으로 단편소설 <둑>이라는 작품도 썼다. 그 작품에서 지금은 '자유로'로 변해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든 그 당시의 '둑'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긴 둑은 한강과 나란히 행주산성에서 서해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마치 용의 꿈틀거림처럼 휘달렸다. 그러면서 둑은 한강 하류 고양 이산포와 산남리 사이에서는 활 모양의 호선(弧線)으로 일산 들판을 포근히 감쌌다. 마치 만삭의 임산부처럼 그 들판을 한껏 보듬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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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하류 산남리 부대 근무할 당시 소대원들과 북한지역을 배경으로 강가에서 기념촬영을 하다(1969. 12,).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북한 경기도 개풍군 지역이다(왼쪽부터 순천 출신의 유시우 하사, 최상신 상병, 충북 괴산 출신의 김홍기 일병, 그리고 네번째가 기자다. 한 사람 건너 안동 출신의 임영규 상병 등이다. 워낙 오래 전이라 나머지 소대원 이름은 가물거린다). ⓒ 박도


가을비

"웬 비람."


앞서 가는 최 상병이 오랜 침묵을 깨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장 하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봄비는 잠 비, 가을비는 떡 비'라 캤다. 오늘 같은 날은 따끈한 아랫목에서 떡이나 쳤으면 좋겄다."
"장 하사님은 뭔 얘기만 하면 떡치는 얘기로 끝냅디다."

"이런 지루하고 힘든 행군 때는 그 얘기가 젤 재미있다 아이가. 누굴 씹는 얘기도 아이고." 
"아무튼 장 하사님은 아는 것도 많은께, 먹고 싶은 것도 많겠습니다."

"아무렴, 쫀득한 인절미를 떡메로 쾅 쾅 내리쳐서 콩고물에 무쳐 먹으면 사람 쥑이는 기라. 나 같이 가방 끈 짧은 놈이야 이 세상 살면서 떡 치고, 떡 먹는 그 재미밖에 더 있것나?"

"근데 아무 절구통에서나 떡을 함부로 치다가는 큰일 납니다. 1소대장 보이소. 한 방에 안 갔습니까?"
"최 상병, 넌 그런 걸 우째 다 알았노?"

"우리 고향에서 금융조합장이 남의 절구통 떡치다가 그 집주인한테 들켜 칼부림이 난 걸 내 눈으로 봤습니다. 아무튼 사내들은 꼬질대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라이 마."

"내 오야지(아버지, 여기서는 '대목'을 말함)가 그러더구만요. 거시기를 뱀 아가리에 넣을지라도 함부로 사람한테는 넣지 말라고."
"야, 그 말 쥑인다. 오늘 내가 니한테 한 수 단디 배웠다. 그 말 백만 불짜린기라."

최 상병은 전직 목수였다. 그는 초등학교 중퇴로 일찍 결혼해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까지 두고 있었다. 그런데 병장 진급 시험에 계속 떨어져 최고참 상병이었다. 그제는 전역 말년으로 아무래도 병장 계급은 달지 못하고 전역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일찍 결혼도 하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막일도 많이 한 탓에 주워들은 얘기는 무궁무진했다.

장 하사와 최 상병의 걸쩍지근한 육담이 소대원들의 긴 행군에 무료함을 달래줬다. 점차 빗방울이 굵어졌다. 우리 소대는 행군을 멈추고 배낭에 매달았던 판초 우의를 끌러 뒤집어썼다. 우의가 워낙 낡은 것이라 잠시 후 끈적끈적한 누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으스름달밤에 개구리 울음 소리…."

장 하사가 또 그의 십팔번 곡을 흥얼거렸다.

"야, 청승 떨지 마! 우리는 지금 행군 중이야."

맨 앞에서 소대를 인솔하던 향도 안 하사가 뒤돌아보면 소리쳤다. 그러자 장 하사는 주춤 입을 닫더니 곧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평생 말뚝 하사나 해라."

그러자 나머지 소대원들은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곧 안 하사는 그 말을 들었는지 되받았다.

"장 하사 니는 한강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뜰 거다. 닌 주둥이 때문에 팔자 사나울 끼다."
"공격! 주의하겠습니다. 밥통이 크신(위대하신) 향도님!"

소대원들은 그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또 키득거렸다.

대남방송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고 바람까지 세찼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이 빗물을 튀겼지만 그걸 피하기에는 그때 우리들의 옷은 너무 젖어 있었다. 부대를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계속 강행군을 했다. 행군 중 비를 피할 장소가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부대교체는 1급 비밀이므로 우리 소대는 간밤 자정 무렵에야 비로소 알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최전방 부대와 교체되리라는 소문은 맴돌았지만 막상 부대교체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한동안 긴장이 감돌았고, 소대원의  얼굴들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X퉁소를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그럼, 군대에서는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거다."

소대원들은 그런저런 말들을 뱉으며 부대이동 명령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행군 도중에 나와 안 하사는 이따금 상황판을 펼치고선 RP(도착지)점을 점검했다. 1번 국도를 행군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비포장도로로 노면이 질척거렸다. 우리 행군 대열이 일산 시가지를 벗어나자 막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거기서부터는 아예 진흙 길이었다. 그 사이 비는 멎었지만 흙길은 진죽으로 미끄러웠다. 자연 행군 속도가 늦어지자 선두 안 하사는 뒤돌아보며 "속보"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소대원들은 몹시 지쳤고, 게다가 워낙 진흙 길이라 더 이상의 속보는 불가능했다.

마침내 일산들판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뿌연 안개비 속으로 길고도 큰 강둑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상황판을 보자 그 둑이 끝나는 지점에 우리들의 RP점이 있었다. 도착점을 확인하자 생기가 솟았다.

나는 뒤돌아 소대원에게 도착지점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쳤던 소대원들도 새로운 기운이 솟은 양,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람이 목표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했다. 우리 소대는 행군을 할 수록 점차 강둑에 가까이 이르렀다. 마침내 북녘에서 스피커 소리가 가늘게 들려 왔다.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대남방송이었다.

"우리 민족의 … 위대한 … 수령님께서는 … 교시하셨습니다. ……"

바람 탓인지 방송은 끊어졌다가 이내 이어지곤 했다.

"저게 뭣이냐 하면 우리 소대원을 환영한다는 소리인 겨."

장 하사가 참지 못하고 또 한 소리를 하자 순천 출신의 유 하사가 거들었다.

"오메! 잡것들, 우리가 오는 걸 귀신 같이 아는구먼."
"아무렴, 이 궂은 날씨에 우리가 오는 걸 쟤네들이 뵈기나 하겠어요. 그저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거지요."

강원도 홍천 출신 유 상병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나도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대남방송을 직접 내 귀로 들었다. 그러자 마침내 접적지역에 온 듯,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대남방송은 소대원들의 입을 닫게 했다. 모두들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소대원의 군화와 바지는 너나없이 진흙이 튀겨 엉망진창이었다. 최 상병의 얽은 얼굴은 흙탕물로 눈만 빠끔했지만 어느 누구도 농담을 하거나 쳐다보고도 웃지 않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대남방송은 더 이상 소대원들의 입담을 막아 버렸다. 둑이 가까워질수록 대남방송 소리가 점차 더 커졌다.

올빼미 생활

우리 소대는 긴 행군 끝에 마침내 둑에 이르렀다. 둑에 오르자 한강이 펼쳐졌다. 서해의 조수가 밀려든 밀물 때인지라 강물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남북으로 이어진 강둑에는 철조망이 강과 나란히 이중으로 쳐 있었고, 그 철조망에는 해질 무렵 과수원 울타리 탱자나무에 참새 떼들이 몰려 앉은 것처럼 녹슨 깡통과 조명 수류탄들이 너절하게 달려 있었다.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합수하는 지점 저 멀리 북녘 땅은 우연 속에 가물거리고, 그 우연 속에서 대남방송이 여울져 계속 우리들의 고막을 때렸다. 우리 소대원은 비 때문에 행군이 늦어져 예정보다 한 시간쯤 늦게 RP점인 산남리부대에 도착했다. 먼저 트럭으로 이동한 중대장을 비롯한 중대원들이 부대 앞에서 우리 소대를 박수로 반겼다.

이곳에서 우리 중대의 주 임무는 북한군의 침투작전이 용이한 한강 하류 일대의 둑을 주야간 경계하는 일이었다. 임진강 하구 북한의 개풍 점곳리에서 조수가 들어올 때 거기서 고무보트를 타면 30분 정도면 한강 하류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일대는 무장간첩들의 주요 침투로이기에 1·21 사태 이후 우리 군에서 경계를 부쩍 더 강화시킨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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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당시 이웃 중대가 주둔한 한강 하류 이산포에 견학을 가다(1970. 5.). ⓒ 박도

막상 산남리부대에 도착해 보니 아찔했다. 영구막사는 하나도 없었고, 중대본부만 초가로 된 흙집이었다.

나머지 4개 소대와 취사장은 천막 막사였다. 게다가 소대장 BOQ도 별도로 없기에 소대 천막막사 한편에다 내 짐을 풀었다.

우리 소대원들은 미처 쉴 새도 없이 막사 정리와 저녁 잠복근무 준비로 첫날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이산포에서 산남리까지 약 6킬로미터의 둑 가운데 수문을 경계로 우리 중대가 그 북쪽 절반을, 이웃 중대가 그 남쪽 절반을 담당해 경계했다.

그 북쪽 3킬로미터의 둑을 50미터 간격으로 60여 개의 무개호(지붕이 없는 초소)를 파서 2인 1조로 야간 잠복초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무개호를 보니까 다시 아찔했다. 비바람을 조금도 피할 수 없는 인권 사각의 초소였다.

60여 개의 무개호에 야간 잠복조를 운영하니까 중대 병력의 3/4이 야간 근무 조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병력은 야간 자대 근무로, 산남리 부대 근무는 전 병력이 경계근무를 서는 밤낮이 완전히 뒤바뀐 올빼미와 같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 다음 글에 계속)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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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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