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요(홍종현 분).
SBS
드라마 속 왕요는 연화를 상대로 노골적 구애를 서슴지 않는다. 그는 황보씨 가문의 세력을 더해 황제 자리에 오를 목적으로 연화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연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현대인들이 이복누이를 대할 때 나타나는 조심스러움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이성을 대하듯이 거리낌 없이 연화를 상대하고 있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됐을 때, 많은 시청자들은 신라 여성 미실을 중심으로 여러 남자들이 공동 남편 역할을 하는 걸 보고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다. <달의 연인>에 나오는 고려 왕실의 연애 문화를 보고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 시청자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근친혼의 전형적 모델인 신라 왕실. 이 가문의 근친혼은 정치적 필요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 왕실의 사례를 관찰해보면,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생긴 배경을 이해하는 게 좀 더 쉬워질 것이다.
신라는 국가 기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석탈해와 김알지라는 강력한 외부인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때 신라는 강력한 세력을 보유한 이들을 상대로 항전을 선택하지 않고 포용을 선택했다.
그런데 포용의 방식이 특이했다. 외부인들을 박혁거세 가문의 일원으로 끌어안은 뒤, 가문 안에서만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왕실과 외부세력의 융합을 도모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라 왕실은 외부세력의 도전을 억제하고 왕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후대 사람들은 신라 왕실이 박·석·김 3대 가문의 연합으로 유지됐다고 생각하지만,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별도의 가문이 아니라 하나의 가문으로 묶여 있었다. 박혁거세가 세운 박성(朴姓) 가문의 구성원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제2대 임금인 남해왕은 해상세력을 이끌고 등장한 석탈해를 평화적으로 흡수할 목적으로 석탈해를 사위로 끌어들인 뒤 아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남해왕은 "앞으로는 아들과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쪽이 내 뒤를 잇도록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석탈해에게 사위 겸 왕자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가 신라 왕실을 공격할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박성 가문 내에서 아들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석탈해는 누가 봐도 이 가문의 일원이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역시 박혁거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가 신라에 출현한 때는, 박혁거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된 석탈해가 임금 자리에 있을 때였다. 김알지라는 신흥세력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석탈해는, 과거에 남해왕이 자신을 포용한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김알지를 박혁거세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 따르면 석탈해는 김알지를 태자 즉 후계자로 책봉했다. 이것은 김알지를 양자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석탈해와 김알지는 박성 가문의 일원이 됐으면서도 석씨 및 김씨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박성 가문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이 여전히 독자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성과 씨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고대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마천이 쓴 <사기>의 '제태공 세가' 즉 강태공 편에 따르면, 강태공은 성(姓)은 강(姜)이고 씨(氏)는 여(呂)였다. 그는 강성(姜姓)이라는 큰 가문에 속한 여씨(呂氏)라는 작은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시대만 해도 성과 씨가 엄격히 구분되었던 것이다.
박성 가문의 일원이 된 석탈해와 김알지가 자신들의 씨(氏)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왕실이 '성'과 '씨'를 복합적으로 인정하는 고대의 관례를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정치적 실력을 인정해줌으로써 그들과의 전쟁을 막는 동시에, 기존 왕실의 일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지켜낼 목적으로, 박성이면서도 석씨를 사용할 수 있고, 박성이면서도 김씨를 사용할 수 있는 절충적 혹은 타협적 상태를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탈해·김알지가 박성 가문의 일원이라는 전제 하에 석씨·김씨를 별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위와 같이 명백한데도, 후대 사람들이 '신라 왕실은 박·석·김 3대 가문의 연합으로 유지되었다'고 믿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김부식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사위가 처갓집의 양자로 인정되고 처갓집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탈해·김알지가 박성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됐다는 사실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고, 두 사람이 자기 씨(氏)를 계속 유지한 사실만 크게 부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탈해·김알지의 사례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신라 왕실은 위협적인 외부세력을 가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 내지는 수완을 갖고 있었다. 그런 다음, 왕실 안에서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왕실의 생명력을 연장했다. 허약한 소국에 불과했던 신라가 무려 천 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이 나라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고려에서 부활한 근친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