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치고 촬영했다.
김지영
짧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모은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귀국한 그는 대학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처음 입학 때 받았던 4년 장학생 신분은 몇 해 전 중국 유학이 끝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던 그 날 상실되었다. 정훈씨는 귀국하면서 가져온 돈을 밑천으로 졸업하고 취업하는 기간 동안 적게 일하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귀국 후 일 년 동안은 그의 바람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굴곡진 인생이 그에게 허용한 시간이었다.
2008년,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던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병세가 악화된 지 3개월 만이었다. 음식점으로 업종을 바꾸었던 어머니는 그 3개월 동안 딱 하루 병원을 찾았다. 아버지가 죽자 그의 꿈도 무너졌다. 어머니가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은행이자가 두 달이 밀렸다. 다음 달이면 건물에 경매가 붙고 날아가게 생겼다. 지금 중요한 게 네 공부가 아니다. 당장 건물은 살려놓고 봐야 하고 가족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우선은 이자를 갚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게 급선무다."어머니는 십년 전 그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현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앉혀 놓고 울면서 했던 말을 십년이 지난 후 그대로 되풀이했다. 절박한 울음과 함께 아들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그래서 스스로 만들어 나갈 미래를 포기해 주기를 호소했다.
"그 때 제가 또 포기했어요. 물론 그 선택이 안 좋은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군대도 갔다 오고 짧지만 외국에서 회사생활도 하고 나이도 아주 적은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 말대로 따르는 게 저에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는 분명하게 알았어요. 알지만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저에겐 언제나 큰 약점이었어요. 그냥 그렇게 살아왔어요. 알지만 포기하면서." 대학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학부를 야간으로 옮겨 낮에 일 하고 밤에 수업을 들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포기되었던 좌절감 때문인지 공부도 되지 않았고 수업은 출석만 건성으로 하는 식의 생활이 이어졌다. 일도 돈을 쫓아 강도가 세고 험한 일을 찾아 했지만 기술 없는 막노동으로는 한 달 2백만 원이라는 이자 돈을 맞출 수가 없었다.
2009년 생활정보신문을 보고 성인오락실에 취업했다. 돈은 넉넉히 받았지만 그것도 육 개월 만에 단속 나온 경찰을 피해 손님들 틈에 끼어 오락실을 나서면서 그 길로 그만 두었다.
2010년 대학을 십 년 만에 졸업했다. 나이 서른이었다. 친구 아버지의 권유로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모텔에 취업해 카운터에서 일하며 공부를 했다. 그 해 일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불운이 따랐다. 모텔 일을 쉬는 날이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용역 일을 나갔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필기시험 합격 후 이어진 체력장 시험에서 탈락했다.
대학까지 졸업한 마당에 계속 용역 일이나 오락실 혹은 모텔 같은 곳에서 일 할 수는 없었다. 동생도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 직원으로 취업했다. 덕분에 매달 혼자 책임졌던 대출 이자를 동생이 함께 부담해 주었다. 그도 이젠 어엿한 직장인으로 살고 싶었다. 경찰공무원 떨어지고 얼마 안 된 시점에 정훈씨가 졸업한 대학 병원행정직 채용공고가 떴다.
대학을 졸업한 그 해 그는 대학병원 취업에 성공했고 진단검사의학실 행정지원과로 발령을 받았다.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졌던 야심대로라면 성에 차지 않은 직장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죽고 어머니의 눈물로 공부를 포기하고 희망을 버렸던 2년 전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비로소 직장다운 직장이었다.
2011년 병원에 취업하고 일 년 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을 때, 그동안 그와 가족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옥죄고 있던 건물이 드디어 팔렸다. 말하자면 경매로 넘어간 게 아니라 팔린 것이다. 팔면서 받은 뭉칫돈으로 덩치 큰 대출금부터 갚았다. 그래도 여전히 빚은 남았지만 오랜 세월 그와 가족들의 삶을 비틀리게 했던 이자 돈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지옥 같은 생활이었어요. 건물 옥상에 가건물을 지어 살았는데 신고가 들어와 철거 되면서 일층 어머니 가게 안 창고에서 네 식구가 먹고 산 세월도 몇 년이었어요. 그 이백 만원 이자 때문에 무려 십일 년이라는 제 인생이 엇나갔고요. 그런 건물이 팔려나가고 큰 대출금을 갚고 나니 제 기분이 어땠겠어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기쁘고 홀가분했죠." 하지만 함께 살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여전했다. 문제는 항상 돈이었다. 건물을 팔았어도 갚아야 할 빚은 남았고 어머니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다. 건물 가게에서 나온 어머니는 식당을 차렸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그전 가게에서처럼 어머니의 관심은 장사가 아니라 식당이라는 자기만의 세계였다. 그나마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이 있어 부담은 줄었지만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주어진 몫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사정을 아는 친척들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그의 인생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2013년, 그는 어머니 집을 나와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어머니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젠 그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천국이었어요. 생활비는 계속 보내드렸지만 어머니 없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저 만의 일상을 살고 저 만의 미래를 꿈꾸게 되었어요."직장 생활은 처음에는 좋았다. 그에겐 제대로 된 첫 직장이었고 임시 계약직에서 곧 안정적인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도 되었다. 언젠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공채정규직 채용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의사들을 돕는 행정지원 업무도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젊은 청년인 그에게 여직원이 많은 근무 환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입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의 눈에 직장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의사중심으로 서열화 되어 있는 병원 구조 속에서 여직원들로부터 관행적으로 안마나 지압을 받는 의사들의 행태가 눈에 들어 왔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직원들은 수치를 참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병원 내 근무환경은 그가 잘 알고 있는 근로기준법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었다.
휴식으로 보장 받아야 할 휴게시간과 식사시간이 함부로 무시 되었다. 늘 부족한 상태인 업무대비 근무인원에 대한 문제를 일상적인 야근으로 해결하면서도 비용은 전혀 지불되지 않았다. 모든 게 그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그 관행이란 것들이 대개는 병원의 이익에는 충실했지만 직원들에게는 불의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다른 위법한 관행들은 그 판단을 따지는 게 모호하거나 복잡한 시시비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상으로 벌어지는 야근이라는 이름의 연장근무에 대한 지급의무 위반은 너무 명백했고 증거도 분명했다.
서른 다섯, 다시 거리에 섰다2014년 그는 증거를 모아 병원에 문제제기 했다. 병원 문을 나오기까지 일 년 동안 그는 하던 업무에서 배제됐고, 직장생활을 오래 해야 하는 다른 직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나중에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해 본 날도 헤아릴 수 없다. 같은 직원 신분이었지만 떠남이 예비된 자와 어떻게든 머물러야 하는 사람의 차이가 불러 온 안타까움이었다. 받지 못했던 초과 근무 수당과 응당 받아야 하는 퇴직금까지 받아내고 병원을 그만 두었다. 다시 거리에 섰다. 2015년, 서른다섯이었다.
일반 기업에 들어가기엔 늦은 나이였다. 재취업에 유리한 경력도 없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축구를 좋아해서 동호회에 가입하고 운동을 해왔는데 그 동호회 선배들 사이에 스포츠 베팅이 유행했다.
직장은 사라지고 아직 갚아야 할 부모님의 빚은 일억 가까이 남아 있었다. 동생과 함께 갚아오고 있었지만 장남인 그의 몫이 더 컸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도 빚 탕감에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 전에는 도박이나 복권 따위 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몇 번 스포츠 베팅을 했는데 의외로 큰돈이 걸려들었다. 그의 일상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라지지 않는 은행 빚이 어쩌면 빨리 갚아질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일주일에 서너 번이 되었다가 매일이 됐고, 만 원 이만 원이 백만 원 이백 만원이 되었다가 이천만 원까지 됐다. 처음에는 돈이 벌렸다. 할 수 있는 모든 종목으로 손을 뻗쳤다. 축구, 농구, 배구, 야구, 하키까지. 자연스럽게 공무원 시험은 없던 걸로 되었다. 나중에는 단타 주식하는 것과 진배없는 피폐한 일상이 되었다. 일 년 반을 그렇게 살면서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종일 인터넷 카페와 단톡방을 들락거리며 정보를 파악하고 베팅을 했다.
가지고 있던 돈이 모두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가 인터넷 카페와 단톡방에서 보았던 정보란 것들이 결국은 그가 가진 돈을 모두 베팅할 때까지 그를 붙잡았던 미끼였다는 것을. 하필 그 즈음에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다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까지 입었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가 주저앉아 있다고 갚아야 할 빚과 이자가 친절하게 기다려 주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주저앉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야 했다. 부러진 다리뼈가 맞물려가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도박으로 잃으면서 깊게 베인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이었다. 아픈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려면 온전하게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네 목욕탕을 다니면서 알게 된, 목수일 하는 형님에게 부탁을 했고 그 팀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2016년 8월 20일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기술자들에게 필요한 자재를 꾸준히 날라야 했는데, 그 자재가 하나같이 무겁고 또 무거운 것들뿐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하루 종일 들고 나르고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전 사행성 도박에 빠져 살았던 죗값을 단단하게 받는 거라 스스로 위로했다.
일이 힘든 만큼 꾸준하고 성실하게 죗값을 받았다. 물리적인 노동 강도는 여전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육체노동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그 전에 다른 일을 할 때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잡역부로 일을 할 때도, 분리수거 일을 할 때도, 병원 직원으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무력했고, 자존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할 수 없이 내가 대신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새벽 거리를 나서 현장에서 일을 하다 때 되면 휴식했고, 때 되면 밥을 먹고 때 되면 정확하게 일이 끝났다. 아직 이른 오후 집에 돌아와 샤워할 때의 뿌듯함과 상쾌함을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매일 노동은 고단했지만 어쩌면 매일 고단했기에 매일 뿌듯했고 매일 상쾌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매일 새벽기상에 대한 부담은 쓸데없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생각도 지워버렸다. 삶이 단순해지고 건강해졌다.
보상도 다른 일에 비하면 적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 육체노동을 하는 이는 박정훈씨가 유일하다. 아직 기술을 배우는 조공신분이지만 다른 사무직 일을 하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그는 고소득자다. 그럼에도 아직 그에게는 올라가야 할 일당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저는 여기에서 미래를 보았어요. 같이 일 하는 어르신들은 처음에 제가 노가다 할 인물이 못된다고 했어요. 그 분들 눈에는 임시방편으로 일 하는 가방 줄 긴 젊은 친구로 보였겠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하면서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무언가 하나를 성실하게 오래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걸 알았다고요. 이 일이 제게 맞는 일이 아니었으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마지못해 일상을 보내고 다른 일거리를 기웃거렸을 거예요. 하지만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제가 당당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요즘처럼 하루를 꽉 차게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매일 노동하고 집에 돌아 와 샤워하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보다 잠이 들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 일상이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노동현장에 들어간 지 일 년이 되었다. 아직 스스로 그리는 그의 미래는 확고하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말해요. 진심으로요. 굉장히 만족해요. 현장에서는 일에 집중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고나 부상으로 이어지죠. 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다음 날을 위해 몸을 챙겨야 해요. 스스로 몸을 아껴야 하죠. 돈도 제가 하루 종일 몸을 써서 땀 흘려 벌었잖아요. 그런 돈은 함부로 써지지 않아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몸도 생각도 그리고 생활까지도 단순해지고 건강해지는 걸 느껴요.""십년 뒤 제 미래요? 그 때가 되면 남은 빚도 다 갚고 당당한 기술을 가진 목수가 되어 있겠죠. 어쩌면 가정도 이루었을 거고요. 그냥 좋은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육체노동이 제 미래예요."젊은 사람이 가장 기피하는 3D 업종의 대표주자 격인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일하는 박정훈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버는 돈 중 일부로 빚을 갚고 어머니 생활비를 계속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매달 백 만 원이 넘는 돈을 적금에 쏟아 붓고 있다. 동 시대 또래들과 비교하면 형용할 수 없는 굴곡진 인생을 보낸 그에게 지금, 노동은 곧 그의 미래였다.
2017년, 그의 나이 아직 서른일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