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첫인상은 거친 육체노동자가 아닌 은퇴를 앞 둔 교장선생님이었다.
김지영
그가 경찰복을 벗었을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그깟 경찰월급보다 훨씬 수입이 좋은 사업을 물려주기를 원했다. 미련 없이 그가 경찰을 그만둘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형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동생은 한의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흔쾌하게 사업의 한쪽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가 키워 온 토목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매일 최루탄과 화염병이 공방을 벌이던 시절이었지만 건설 경기는 큰 물결을 타고 거침없이 치닫던 호시절이었다.
그의 회사도 그 물결에 올라탔다. 신탄진에서 추풍령 구간 도로 재포장, 32개 탄약고 벙커 시공, 강원도 정선 도로 확장 등 굵직한 공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당시 돈으로 매달 일억 원이 넘는 돈이 순수익으로 쌓여갔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집안에 들어앉은 때도 그즈음이었다. 돈 걱정이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했다.
사업이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한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부터였다. 전국적으로 건설업이 하향하는 추세였다. 그가 올라탔던 큰 물결이 큰 굽이를 만났다. 삼십 대 후반, 아직 중년에도 끼지 못할 만큼 젊고 푸르던 나이였다. 주로 해왔던 토목공사가 일감이 줄어들면서 대전 시내 재개발 단지나 수영장 등으로 공사영역을 좁혀가던 중이었다.
지역에서 높은 도급순위를 자랑하던 건설 회사들이 줄도산하면서 공사비로 받았던 어음이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부도를 맞았다. 자그마치 60억 원이었다. 종이쪼가리가 된 어음을 다시 돈으로 되돌려야 할 몫이 그에게 떠넘겨졌다. 지불받아야 할 돈은 지불되지 않았고 지불해야 할 돈은 지불되어야 했다. 하지만 60억 원이라는 돈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졌다.
그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가진 재산을 빼돌리고 종이쪼가리가 될 어음을 발행해서 고의부도를 내는 것과 가진 것을 모두 털어 빚잔치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 선택은 그가 살고 채권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선택은 채권자를 살리고 그가 죽는 것이었다. 양심을 팔고 재산을 지키느냐 양심을 지키되 파산을 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그와 가족들의 명운이 달린 결정이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전자가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이 '가진 자'로 살아남은 자에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공'이라는 화관을 얹어주던 시절이었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성공이라는 화관보다 그의 마음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족들을 향해 있었다.
남기방씨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평생을 개신교인으로 살았고 그때까지 인생에 일탈 한번 없이 자신의 인생을 가꾸어왔다. 아내와 행복했고 두 아들을 반듯하게 키워내고 있었다. 그는 영악한 사업가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고민의 정점은 양심을 지켜내는데 필요한 용기였다. 이후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칠 암담한 운명은 불을 보듯 확실한 미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를 움직인 건 두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고 싶은 강한 부정(父情)이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에 팔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 30억 원이었다. 변호사인 사촌 형을 동석시킨 자리에 채권자 스물다섯 명을 한날한시에 불러들였다. 그 돈 30억 원을 내놓고 모든 사정을 다 이야기했다. 재산을 빼돌리고 부도어음을 발행해서 자기 살길만 찾는 세상의 관행에 익숙해 있던 채권자들은 처음에는 의아했고 곧 감동했다. 빚잔치는 순조롭게 끝났다. 모든 채무는 채권자들의 동의하에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산했다.
2년의 허송세월 덕에 만난 기회이십 대 후반 경찰복을 벗고 다른 길로 꺾어 들었던 인생의 변곡점을 사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맞았다. 공통점이 있었다. 광주에서 경찰복을 벗었던 이유도, 대전에서 빚잔치를 벌였던 이유도 모두 양심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참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아름답게 파산했지만 이어진 몇 년의 삶은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는 일 년을 스스로 집에 가두고 두문불출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사업을 망쳐버렸다는 자괴감과 사업실패에 따른 상실감은 예상보다 크고 깊었다.
그가 바로 돈벌이를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힐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보내주는 넉넉한 생활비가 있어 가능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여전히 사업체를 건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활비는 아내와 아이들이 먹고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일 년을 낚시만 다니면서 그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어쩌면 부자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내상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돈벌이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2년 동안이나 모든 관계를 끊은 채 칩거를 하고, 낚시만 다녔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60억 원이란 돈이 그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만큼 큰 금액이었을 수도 있다. 그 상실감을 이겨내려면 2년이란 시간이 꼭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가 그렇게 상실의 시간을 무력하게 보내고 있던 그때도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집 밖으로 등도 떠밀지 않았고, 불만스러운 어투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기다렸고 또 기다려주었다.
빚잔치 후 파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 다시 낚시로 세월을 보내기를 2년이었다. 삼십 대를 지나 사십 대 초반이었다. 점점 그렇게 피폐한 일상이 이어지고 그가 폐인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철근 오야지(책임자를 뜻하는 일본어)' 집사님이 그에게 "그러지 마시고 저 일하는 데 와서 심부름이라도 하시죠"라고 제안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시 고쳐 잡고 무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생활비를 보내주었던 아버지에게 더 의탁할 염치는 없었다. 혼자 힘으로 무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토목회사 사장, '철근 오야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