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민청련동지회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들은 야당의 의정활동에 대한 보도조차 가능하면 소략하게 다룰 뿐이었다.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 활동 금지 조치 아래 있던 이들에 대한 보도는 '보도지침'에 의해 철저하게 금지됐다.
앞서 1983년 5월, 정치 활동금지에 묶여 있던 김영삼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언론에도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이 있던 기자와 데스크는 '보도지침'을 피하여 보도할 방법을 찾다 보니 수수께끼와 같은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신문 구석의 작은 가십난에 "최근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신경을 쓰는 눈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는 웃지 못할 표현도 있었다.
이러한 언론 상황에 대해 가장 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80년에 해직된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1984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민언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에 정부의 간섭을 거부한 대항언론으로서 월간 <말>을 창간했다.
운동의 진로를 밝힐 기관지 그에 앞서 1984년 초부터 민청련 내부에서는 대항언론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민청련이 지향하는 것은 민언협의 '대항언론'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월간 <말>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기존 제도언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모색되었다면, 민청련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부문 민주화 운동 소식을 운동세력 내부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나아가 당면 정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정세분석'을 운동세력들이 공유할 필요성, 운동세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논쟁들을 정리할 필요성 등이 절실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민청련 집행부는 기관지의 형태로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기로 결정한다. 정권의 시각에서 이는 '불법 유인물'일 것이었고, 당연히 탄압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편집부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는 당시 상임위 부위원장 이해찬이었다. 이해찬은 성균관대 73학번 김희상에게 편집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희상은 이후 민청련 집행부로 진출해 대변인을 맡았으며 김근태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2011년 아직 한창일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김희상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길> 편집에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78학번으로 이른바 '제헌의회' 그룹의 이론가로 맹활약했던 최민에게 편집 진행을 맡겼다. 최민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선후배 편집진들을 지휘하며 <민주화의 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84년 3월 11일, <민주화의 길> 창간호가 발행됐다. A4용지 크기의 갱지 20페이지를 흑백으로 인쇄한 뒤 중철로 제본한 소박한 간행물이었지만, 이를 받아본 편집진들은 그동안의 고생을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