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민청련동지회
CNP론을 정리하다 민청련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 정세를 분석하고 활동방향을 정하는 일이었다.
특히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통합과 같은 사안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는 일이 잦았다.
논의가 점차 복잡해지자 김근태 의장은 이을호 정책실장에게 논의의 가닥을 간명하게 정리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을호가 연륜이 깊은 운동가들을 접촉하고 정리해낸 것이 이른바 'CNP론'이었다.
CNP란 CD 즉 Civil Democracy(시민민주주의), ND 즉 National Democracy(민족민주주의), PD 즉 (People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 당시 각 운동단체 및 운동세력의 성향과 노선을 분석하여 이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각 노선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추구하는 변혁노선도 다르게 표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CD는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된 주변부 자본주의로 바라본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 아래서 핍박 받는 계층은 노동자, 농민, 빈민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자와 중소자본가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당면 투쟁의 목표는 세계자본에 종속된 독재권력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70년대 이래 정치운동을 이끌어온 이른바 재야세력이 그 중심이다.
PD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는 국가독점자본주위라고 본다. 즉 단순히 외세에 종속된 체제가 아니라 스스로 상당 수준의 자본축적을 이루고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면 과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담당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 이끌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에서 말하는 '노동현장론'이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구축된 것이다.
ND는 겉으로 보면 CD와 PD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청련은 CD와 PD를 포용하며 연대한다는 지향에서 ND론을 정립시켰다.
정리된 ND론은 한국사회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 체제로 규정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신식민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민족적 모순과 독점자본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투쟁방향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을 이루되 다양한 중간층을 아우르며 연합전선을 형성해 민주적이고 민족 자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CNP론은 회원 내부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전 회원에게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CNP론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대학생 출신들의 지나친 학구적 탐구심이 발동된 것으로 실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논쟁은 다가올 85년 초로 예정돼 있는 정치일정, 즉 2·12 총선에서 운동세력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운동권의 시각에서 보면 총선거는 제도권 정치세력들이 판을 벌이는 마당이었다. 이러한 총선거에 대해 C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선거 국면을 적극 활용하자는 주장을 폈고, P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민중의 이해와 전혀 무관한 선거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변수로 등장한 것이 양 김씨가 이끄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반민주적 법령이 민주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선거는 오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선거를 보이코트할 기세를 보였던 것이다.
민추협의 움직임은 운동 세력에게 논쟁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민추협이 전두환 정권과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총선에 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그들을 아군으로 여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선거에 대한 운동세력의 대응방향을 놓고 선거 거부론과 선거 활용론이라는 양 극단이 대립했다.
선거 거부론은 다가올 2·12총선은 민정당과 군부 세력의 장기 독재를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추협이 민한당과는 다른 투쟁적인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정권이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그들과 야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에 개입해서 한국 사회 모순의 궁극적 해결을 도모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전면 거부하고, 오히려 기층 민중의 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선거 활용론은 선거 거부론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즉 선거는 전두환 독재정권이라는 '지배체제의 재생산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지만,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선거 거부라는 전술을 도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더구나 운동세력의 역량이 열세에 있을 때는 선거라는 국면을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역량이 선거를 거부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을 때조차도 단순한 선거 거부가 아니라 대안적 정치 구조의 창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방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 활용론의 입장에서 2·12 총선은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되는 시기이며, 그러한 정세 조건을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즉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실천 프로그램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의 충격파총선과 관련한 논쟁은 민청련 내부뿐만 아니라 운동권 전반에서 벌어졌지만,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의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었다.
민청련의 선전력과 동원력은 선거라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행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민협, 국민회의 등 운동세력의 연대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열을 편성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대중동원력이 큰 야당정치세력과도 제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결국 야당정치세력과의 '제휴반대론'과 '제휴찬성론'이라는 틀로 의견이 갈렸다. 민청련 지도부 가운데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대체로 '제휴반대론'에 기울어 있었고, 김근태 의장이 '제휴찬성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회원들 사이에 의견의 분포는 정확히 계량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제휴찬성론이 약간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가올 총선에 대한 노선을 두고 논쟁하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11월 14일,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 260여 명이 서울 안국동 민정당사를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1984년 당시의 학생운동은 주로 교내 시위의 형태를 취했고, 이따금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물론 학생들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투쟁방식이었다. 이후 민정당사, 미국문화원 등에 대한 점거 농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점거 학생들은 이전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을 연세대에서 갖고 그 자리에서 '반독재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은 당시 각 학교에 만들어져 있던 조직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연대하여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준비론'이나 '노동현장론'을 비판하며 즉각적이고도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정당사를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민정당을 찾아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건물에 "노동악법 개정하라" "전면해금 실시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구호와 당면 정치정세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내걸고 글자 그대로 선도적 투쟁을 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