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내부의 제단 저 제단 안 쪽에 성 미니아토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박기철
당연히 이런 주교의 행태를 비판하는 수도사들이 등장한다. 주로 개혁성향을 지닌 도미니크회 소속 수도사들이었다. 교황은 주교 산하에 있던 한 수도원을 교황 직속으로 바꾸어 수도사들에게 근거지로 제공했다.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수도사들을 활용하려는 계산이었다. 여기에 주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또다른 귀족 세력들이 합세한다.
반대 세력의 공격이 거세지자 힐데브란트 대주교는 자신의 종교권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새롭게 건축한 성당이 바로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Basilica San Miniato al Monte)'이다.
산 미니아토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는 얘기에 순박한 시민들은 몰려들었고 자신들의 재산을 바쳤다. 성인의 유골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종교적 권위를 상징했다. 그래서 유명한 성당들 중에는 예수나 성인들의 시신 일부와 각종 성물을 안치한 곳이 많다.
주교의 재산은 더욱 불어났다. 이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주교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성당에 기부한다. 하지만 성당의 재산 관리인으로 자신의 아들을 임명한다. 재산을 지키기 위한 꼼수였다.
수도사들이 힐데브란트 주교의 부정부패에 항의하기 위해 산 미니아토 성당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교의 부인이 앞을 막으며 자신에게 안건을 얘기하면 주교에게 전해주겠다고 말한다. 타락한 주교의 부인이 거만하게 앞길을 막자 수도사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수도사들은 주교와 부인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돌아갔고 이는 13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대립의 시작이 된다.
당시에도 미니아토 성인의 이야기는 주교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지어낸 것이며 성당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유골도 가짜라는 의심이 끊이지 않았다. 현대 여러 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한다. 진위가 어찌되었든 주교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미니아토 성인을 이용한 것은 분명하다.
교황은 이러한 주교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징계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주교는 오히려 독일 황제(신성로마 제국)에게 뇌물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한다. 당시 황제와 교황은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교가 교황의 적과 손을 잡고 대항하니 교황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황제의 편에 선 주교와 전통 귀족 세력들이 훗날 피렌체의 기벨린파(황제파)가 된다. 그리고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주교에게 대항하는 개혁적인 수도사들과 귀족들은 겔프파(교황파)가 된다. 이 두 파벌은 토스카나 여러 지역에서 무력충돌까지 불사하며 200년 이상 치열하게 대립한다.
겔프파에게 패배한 기벨린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1260년 테아페르토 전투에서 기벨린파가 이기자 이번에는 겔프파가 쫓겨났다. 이런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피렌체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이 두 파벌의 마지막 충돌은 1289년 캄팔디노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Battaglia di Campaldino)였다. 겔프파가 승리한 이 전투에 당시 젊은 단테도 참전했다. 그동안 상대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쌓였던지 겔프파는 기벨린파를 처참히 살육한다. 그 현장을 목격한 단테는 "노예 같은 이탈리아(Serva Italia)"라며 탄식했다.
이후 기벨린파는 힘을 잃고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기에는 아직 더 많은 투쟁이 필요했다. 겔프와 기벨린의 대립은 끝났지만, 귀족과 신흥상인, 겔프 백당과 흑당의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부유한 상인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동자의 투쟁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