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빌리 진 킹이 챔피언으로 활약하던 1970년대만 해도 테니스 대회의 상금은 성별에 따른 격차가 매우 컸는데 이는 남성부 경기의 인기가 더 높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거의 모든 프로 스포츠 리그에서 남성부 경기가 여성부 경기에 비해서 '수준이 높다', '박진감이 있다' 등의 허술하고 빈약한 근거를 내세우며 연봉이나 상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한다. 이러한 처사는 여성 리그의 흥행을 위한 투자를 방해하고 결국 기반 부족으로 인해서 선수 발굴이 어려워지는 등의 악순환을 양산한다.
부당한 제도에 반기를 든 빌리는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여자부 대회 보이콧을 선언하고 세계여자테니스협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협찬사를 모으고 새로운 대회를 개최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던 중에 빌리의 파격적인 행보를 눈여겨 보던 전 윔블던 챔피언 바비 릭스가 빌리에게 성대결을 제안한다. 이것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빌리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사상 최초의 빅매치가 성사됐다.
결과는 빌리의 압승. 이후에도 빌리는 테니스 메이저 통산 39회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 프로 선수로서는 최초로 커밍아웃을 한 선수가 되기도 한다. 빌리의 끈질긴 노력은 2007년, 드디어 남녀동일 액수의 상금을 쟁취함으로써 결실을 맺는다.
이로써 테니스는 여러 개의 프로 리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성차별적인 보상 제도를 바꾼 종목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NBA 남자 선수들이 여성 선수들의 100배 가까이 높은 연봉을 받고 남자부 PGA 대회의 상금이 여성부 LPGA 상금에 비해서 5배 높은 것을 보면 이는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다시 남성 테니스 선수들 가운데서 상금 액수에 차별을 두자는 의견이 있지만 빌리가 이뤄낸 성취의 가치를 아는 후배 선수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자 세계 챔피언인 세리나 윌리엄스는 상금 차별 지급에 대해서 '여성들은 절대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빌리 진 킹은 은퇴 이후에도 환경 운동에 앞장서고 성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에 힘쓰는 등, 존중받지 못하는 소수를 위해서 꾸준하게 목소리를 냈다.이러한 행보는 그와 얽힌 유명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빌리는 십대 시절에 테니스복이 없는 아이들이 단체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힘없는 사람이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 말은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에, 저는 최고가 돼야 했습니다."
빌리 진 킹이 최고가 되는 데에는 의지와 노력이 작용했을 터다. 여기에 생애를 걸고 지켜야 할 투철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최고에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경제개발로 국가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한국의 스포츠계에도 영웅이 필요했다. 국가 대항전에서 우승한 선수는 애국심을 전파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몇몇 선수에겐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운동 영웅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난한 소녀에서 꿈을 이룬 영웅으로 선전에 이용됐던 대표적인 인물이 임춘애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라면만 먹고 달린, 극빈한 소녀로 회자되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구시대적 선전이 시대의 변하면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선수들에게는 '악조건을 극복한 비인기 종목 선수'라는 타이틀이 따라 붙는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영화화됐던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 팀이 그랬고 컬링으로 은메달리스트가 된 팀 킴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훈련 기간 내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뛰어난 성적을 거둔 이후에는 극악한 환경을 노력 하나로 극복해낸 영웅으로 부각됐다(관련 기사 :
임춘애 '라면 촌극'과 '양학선 마케팅').
또 김연아 선수가 캐나다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언론과 기업은 '세계 초일류 국가'를 내세우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이룬 업적의 이면에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토대를 극복해낸 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
여성의 말 들어주지 않는 코트... 김연경이 박수 받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