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우리는 몇 시간을 커피와 주전부리를 옆에 끼고 온갖 이야기를 나눈다.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도면은 한 장이 아니다. 그러자니 우리 사이에 대화의 물결이 마치 장강처럼 흐르고 있다.
이현화
집을 짓는다는 건 오로지 취향에서 시작해서 취향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취향이라는 게 일목요연하게, 보고서 정리하듯 제출해서 공유될 것이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는 '제가 짓고 싶은 집은...'이라고 메일로 주고 받는 걸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약 8개월여에 걸쳐 우리는 때로는 2~3주에 한 번, 또 때로는 1주일에 한 번, 또 때로는 1주일에 한두 번을 지속적으로 만났다. 처음 몇 번은 온통 수다에서 시작해 수다로 끝났다. 강물처럼 흐르는 수다의 물결 아래 집을 지으려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집을 지어줄 그가 어떤 집을 어떻게 지어왔는지에 관한 탐색이 이어졌다.
나의 집의 설계를 맡아준 그는 내가 손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이름만 대면 알 사람은 다 아는 큰 설계회사 소속이었다. 일본의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 사용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일본 건축가 00 000(노출콘크리트라는 단어에서 얼핏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그 사람이 맞을 것이다)의 한국 파트너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어쩌다 한옥과 작은집의 매력에 빠졌고, 실제로 서촌 한옥에서 살면서 서촌의 이웃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서촌에서 지어지는 몇 채의 한옥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좋은 바람인지 몹쓸 바람인지는 모르지만, 10년 정도 다니던 큰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력갱생의 삶을 도모하고 있었다.
나를 만난 때는 퇴사를 한두 달여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고, 말하자면 나의 한옥은 독립 후 본격적으로 돌입한 그의 첫 작업인 셈이었다. 건축가들은 보통 자신들이 설계한 건물들을 전문 사진작가를 통해 촬영하고, 그것을 포트폴리오로 활용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이다. 독립을 이제 막 준비하고 있는 그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나는 실상 그런 게 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의 사람이었다. 겉으로 멋지게 보이는 건, 누구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화려찬란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여러 개 프로젝트 중에 하나, 작업 목록 중 하나로 내 집을 멋지게 짓기보다, 오히려 '처음'이라는 그 타이밍에 더 마음이 끌렸다.
세상의 모든 처음은 서툴 수는 있으나, 그 안에는 익숙함이 주지 못하는 성의와 정성이 배어들게 마련이다. 대규모 단지를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대지 26평짜리 작은 집에, 사기를 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야, 서툴러서 망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범위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문제가 생기면 함께 해결해나가면 된다.
어쩌면 거기에는 내 상황으로 인한 공감과 감정이 이입된 것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그 무렵 회사를 그만두고, 자력갱생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직장인으로 오래 살다가 조직을 떠나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내가 이제 갓 독립을 했다고 해서, 독립 이후 내 이름으로 내놓을 성과가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 나의 업력이 백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독립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 용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나를 믿고 싶었고, 그는 아마 그를 믿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믿음과 용기를 믿고 가기로 했다. 그와 내가 삶의 새로운 분기점에서 만나 서로의 처음을 공유하며, 함께 성의와 정성을 다해 지어가는 과정을 나누고 싶었다.
이런 과도한 의미부여와는 별개로 사실 우리는 '반백수'나 다름 없었다. 뭔가 할 일은 무척 많지만, 직장인처럼 사무실에 의무적으로 앉아 있지는 않아도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다. 서로의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공유하며, 퇴근 후거나 주말에만 만나야 하는 한계를 벗어나 평일 훤한 대낮에 만나 우리를 둘러싼 한낮의 햇빛과 대기를 맘껏 누리며 우리가 함께 지을 집에 관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