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리도서방부분과 모가디슈
김선흥
이제 그 바로 위를 보겠습니다. 羅的里尼(중국어 '루어디리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킬까요? 힌트는 그 바로 왼쪽의 굵고 푸른 물줄기, 즉 나일강입니다. 몽골 및 원나라 역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중국의 류잉셩(劉迎勝, Liu Yingsheng) 교수(남경대)에 의하면 '羅的里尼(루어디리니)'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나일강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페르시아어 '루드이닐(Rud-i-Nil)'의 음을 중국어로 옮긴 것이 '羅的里尼(루어디리니)'임이 확실하다고 류잉셩은 주장한다." - Nurlan, <The Silk Road 14(2016)>, 110쪽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 나일강의 이름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가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강리도의 가치
강리도가 지닌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강조하면 '국뽕(지나친 국수주의를 뜻하는 신조어)'이라는 조건반사가 일기도 합니다. 그건 엉뚱한 과녘을 쏘는 화살입니다. 강리도 예찬의 발신처는 국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나라 밖 유수한 대학의 학자들입니다.
강리도가 서양에 최초로 소개되어 놀라움을 일으켰던 것은 우리 국내에서는 강리도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때인 1946년이었습니다. 그 문열이는 발터 푹스(Walter Fuchs, 독일인)라는 저명한 동양학자였습니다. 1953년에 발간된 지리학 전문 잡지 <Imago Mundi>에서 발터 푹스는 이런 요지로 강리도를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1946년 출간한 중국학 소책자에서 1402 강리도에 대해 지면을 좀 할애한 바 있다. 이 중요한 문헌(강리도)을 역사 지리학도들에게 보다 널리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여기에서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 강리도의 극동 지역에 대해서는 1938년 아오야마(본의 역사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하지만 강리도의 서방 지역은 여태 소개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는데 사실상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곳이다.
(...) 강리도의 좌편 아래쪽에 그려진 아프리카 대륙의 모습이야말로 매우 흥미롭다. 거기 나타나 있는 삼각형 모습의 아프리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남단의 특이한 형태를 그린 지도는 1500년 이전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Walter Fuchs, <Imago Mundi> Volume 10, 1953
참고로 강리도보다 훨씬 크면서 유사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지도가 중국에 하나 있습니다(아래 지도). '대명혼일도'라는 이름의 이 지도를 외부인으로서 최초로 열람한 후 소개한 학자도 또한 발터 푹스였습니다.
그는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를 16세기 후반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근래 중국학자들은 대체로 1389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맞는다면 대명혼일도가 강리도보다 13년 앞서게 됩니다.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하여 대체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발터 푹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명혼일도의 지명은 홍무 2년 즉 1389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 지도가 1389년 혹은 그보다 조금 후에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학자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까닭인즉 1389년에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대명혼일도의 원천 지도(대명혼일도 제작시 참고했을-역자)였을 것이고 대명혼일도 자체는 그보다 훨씬 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대명혼일도와 강리도의 결정적 차이
그럼 이제 대명혼일도와 강리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세계상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대명혼일도는 한반도가 아주 엉성하고 서쪽의 아프리카도 좌단 부분이 잘려 나간 형상입니다. 강리도에는 만리장성이 선명한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강리도의 인도는 중국대륙에 함몰되어 인식하기 어려운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돌출된 반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강리도는 지도 하단에 제작 배경과 제작자 및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는 데 반해 대명혼일도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두 지도의 제작 시기의 선후는 차치하더라도 보다시피 강리도의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두 지도가 같은 세계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몽골세계대제국의 유산입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 제작 시 모본으로 삼았던 지도가 몽골제국의 지도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강리도의 하단에 적혀 있는 글에 모본 지도의 이름과 제작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세계상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 문헌적 증거가 바로 강리도라는 지도, 그리고 그 하단에 적힌 기록문이라는 말이지요. 강리도가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