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다시 불어온 페미니즘 열풍 그리고 미투 운동 이후 쏟아져 나오는 기사를 보며, 요즘 나는 다시금 내가 겪었던 소외의 순간을 곱씹고 있다. 이 기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서로를 향한 적대와 갈등이 지나치게 극심해지고 있다'고 말이다.
이는 대부분의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들이 갑자기 화를 내고 시끄러워졌다고 이야기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북미에서 발생했던 페미니즘을 향한 '백래시(역풍)'의 재현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저런 식의 말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의 극심한 성차별과 만연한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사람이 움츠러들고 질문하게 만든다. 스스로가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리고 이런 의문은 당사자가 일상에서 차별과 혐오를 마주할 때 침묵하도록 유도한다.
남자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충돌'과 '갈등'은 진실을 위장하는 말이다. 여성을 향한 혐오와 여기에 대항하는 분노는 대칭적이지 않다. 두 정서는 대등하지도 성질이 겹치지도 않는다.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오드리 로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혐오는 아주 싫어하는 감정이 적의와 결합된 감정적 습관이자 마음의 태도다. 남자들은 남성성에 속해선 안 된다고 여기는 부정적인 속성들을 여성성에 부여한다. 그리고 이를 이유로 여자들을 멸시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혹은 유약하고 수동적이어서 안 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여성 개인이 그러한 '여성성'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까?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게 규범을 벗어난 여성들을 억압한다. 여성들을 차별해도 괜찮은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남자들이 남성으로서 가졌던 기득권이 무너짐을 의미한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들은 자신이 멸시했던 여성들을 거꾸로 이상적이라 찬양하곤 한다. 그래야만 여성들을 분리하고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남성들이 어떤 면에서든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여성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혐오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누가 수용되고 배제되는지를 알려주는 은밀한 압력이기도 하다.
남자들의 혐오와 여성들의 분노가 절대 같지 않다
결과적으로 혐오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개인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정의할 힘을 빼앗는다. 고정된 여성성에 맞추어 살면 박해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그렇게 차별과 억압만이 존재하는 위치로 여성들이 스스로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삶인가?
때문에 로드는 이런 말을 한다. 혐오는 파괴적이라고. 혐오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맞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삶이 아닌 것을 삶인 척 가장하고 살라는 요구는 죽어 있는 상태로 지내라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는 다르다. 다시금 로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분노는 사람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 목적은 변화에 있다. 그래서 분노는 잘 활용한다면 결코 유해하지 않다.
아마도 오드리 로드가 말했던 '왜곡된 관계'에는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맺는 관계다. 성차별주의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여성은 고유한 개인이 아니라 오직 '여성'으로서만 남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여성은 어떤 공간에서든 아내이거나 딸 혹은 성적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회사에서든 학교에서든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혹은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공동체 내 성차별과 성폭력 기사들이 그 증거다. 지금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러한 '왜곡된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다.
하지만 슬프게도 남성들은 이 왜곡된 관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관계가 자신들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한 것이었고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를 오히려 '역차별'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 하겠다'와 같은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남성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미 알고 있다. 여성들이 분노를 수용할 때 자신들이 내려놓는 것은 결국 차별로 만들어진 부당한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애초에 평등한 관계라면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분노가 전혀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