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일본 시민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경년
도쿄에 마스크맨들이 많은 비밀
그러나 그 부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쿄의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면 유독 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 마스크를 많이 쓴다. 저렇게 얼굴을 꼭 싸매고 다니면 얼굴에 땀 차고 숨쉬기도 불편할 텐데 어떻게 다니나 궁금했다.
독감이 유행한다더니 그래서인가 했는데, 일본에는 독감보다 더 무서운 '화분증(花粉症.카훈쇼)'이라는 게 있었다.
'화분증'이란 일종의 꽃가루병으로, 매년 봄만 되면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은 물론 재채기, 가려움증, 고열 현상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이룰 정도로 환자들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일본인 둘 중 하나는 크고 작은 화분증을 겪고 있고, 한해 7500억엔의 소비감소를 낳는다는 조사까지 있을 정도로 사회경제적으로도 피해가 크다.
일본이 유독 다른 나라와 달리 화분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2차대전 때의 공습과 전후의 마구잡이 벌채로 인해 산림이 황폐해지자 일본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시작했고, 그때 주로 심은 나무가 일본말로 '스기(衫)'라고 하는 삼나무이다.
일본이 원산지인 삼나무는 예로부터 생장이 빠르고 가공이 쉬운 걸로 유명하다. 일본 곳곳에 있는 천혜의 원시림에 가보면 몇 사람이 팔 벌려 끌어안아도 닿을까 말까 한 엄청난 굵기와 크기의 아름드리 삼나무 군락이 형성돼있다. 교토 등 오래된 도시에 중국의 자금성 건물들보다도 더 큰 사찰 건물이 즐비한 것도 따뜻한 기후와 함께 마구 자라주는 삼나무 덕분이다.
아무튼 기대대로 무럭무럭 잘 자란 삼나무는 일본의 전후 재건에 큰 도움을 됐다. 하지만, 과유불급이었는지 삼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가루들이 바람에 날리면서 일본 전역이 화분증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삼나무의 역습' 혹은 '삼나무의 복수'란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 화분증이란 게 재밌는 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몸에 비축할 수 있는 꽃가루의 양에 한계가 있어서 일정 기간까지는 괜찮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얘기다. 즉, 일본에 온 지 오래된 외국인도 멀쩡하다가 개인적 한계에 다다르면 그 이듬해에는 눈물콧물 흘리며 화분증을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물론 평생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오자마자 고생할 수도 있다.
작년 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학부생들의 수업을 청강한 적 있었는데, 한 번은 뒤에 앉은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 내내 몇 분 간격으로 휴지에 대고 계속 코를 푸는 것이다. 가급적 신경 안 쓰고 수업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아 자꾸 쳐다보게 됐다. 나도 나지만 교수님이 짜증 내지는 않을까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교수님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무사히 수업을 끝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지하철에서 전화통화도 안 하는 사람들이 이걸 참아주는 게 참 대단하다. 화분증의 고통을 다 이해하기 때문일까. 그 후로는 식당에서도 유독 코 푸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