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휘문학교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여운형 선생
몽양기념관
건준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좌우익의 인사를 고루 실무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3대 강령을 내세웠는데, 첫째는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 둘째는 전체민족의 정치적ㆍ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셋째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운형은 9월 4일 미군의 진주에 앞서 건준을 모체로 국내 혁명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한 달 만에 남한에 145개의 지부가 결성될만큼 국민의 지지가 따랐다. 미군 환영을 위해 여운홍ㆍ백상규ㆍ조한용을 건준의 대표로 인천에 보내 하지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9월 2일에 맥아더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ㆍ소 양국의 분할 점령 정책을 발표하고 9월 7일에는 미 극동사령부가 남한에 미군정의 실시를 선포하면서 인민위원회 등을 불법단체로 적시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중, 9월 7일 6인조 테러단의 습격을 받았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적대시하고 그의 조직을 불법단체로 인정하면서, 잇따라 테러가 일어났다. 인민위원회의 상부 조직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여운형의 일대 정치적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미군정 당국이 여운형과 건준을 적대시한 데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 미군은 선발대를 서울로 보내어 총독부의 항복절차를 밟도록했다. 총독부는 이 선발대 요원들을 최고급 호텔에서 영접하면서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날조한 문건을 만들어 건넸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여운형에게 과도기적인 치안유지를 맡겼는데, 그가 건준을 조직하는 등 독립정부수립 쪽으로 활동하자 그를 배척하는 엉터리 정보를 미군측에 제공한 것이다. 그 대신 친일경력의 한민당 인사들을 두둔하는 자료를 만들어 건넸다.
하지와 미군정 수뇌부는 이같은 총독부의 엉터리 정보에 따라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친일부역자들을 군정의 요직에 중용하고 한민당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임시정부와 건준→인민위원회 등은 불법단체로 만들었다.
에드가 스노가 지적한 대로 아무런 준비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 것이다. 건준은 여운형ㆍ안재홍을 비롯하여 김병로ㆍ이인ㆍ허헌 등 우익 및 중간노선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고, 중앙위원회에도 김준연ㆍ이용설ㆍ김약수ㆍ이강국ㆍ김동화ㆍ최용달 등을 임명하여 좌우 각 계열 인사들이 고루 포함되었다.
송진우ㆍ장덕수 등 우파세력은 건준에 참여를 거부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충칭의 임시정부 봉대를 내세웠다.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린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중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자 돌변하여 한민당을 급조하고 미군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자신들의 행적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건준 참여를 주저하고, '임정봉대'에서 '미군정 봉대'로 잽싸게 변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