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조선총독부 광장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1945.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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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8월 20일 미군의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미군의 진주를 예고한데 이어, 9월 2일에는 다시 미 제24군단사령관 하지 중장 명의의 포고 삐라를 살포했다.
〈남한 민중 각위에 고함〉이란 제목의 '재조선 미군사령관 포고 1'과 2. 3으로 계속된 포고령은 해방군이기보다 점령군적인 내용이 담겼다.
"주민의 경솔ㆍ무분별한 행동은 의미없는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이다", "각자는 보통 때와 같이 생업에 전념해주기 바란다.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 기설 기관의 파괴 등의 경거망동을 하는…." 따위의 협박적인 내용이 담겼다.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실시한 일련의 정책과 분위기는 해방군이라기보다 점령군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냈다. 남한의 경우 9월 12일 하지 중장이 아놀드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하고, 20일에는 군정청의 성격ㆍ임무ㆍ기구 및 인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에 앞서 9월 8일 남한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제1단계로 서울ㆍ경기지역을 점령하고 7월 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ㆍ수원ㆍ춘천 등을 점령했다. 제2단계에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지역이 확대되어 10월 10일까지 경기ㆍ강원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제3단계는 6사단에 의해 전남북 점령으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점령'이란 표현을 썼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어서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충칭의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의 인민공화국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그대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손시키면서 조선인 행정관리, 경찰을 인수받아 통치했다. 일제에서 미국으로 주역만 바뀐 셈이다.
하지 장군은 김성수 등 11명의 한국인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한데 이어 조병옥ㆍ장택상 등을 경찰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지주출신의 친일 인사들을 행정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ㆍ경찰ㆍ지주 등 반민족적 인사들의 재등장 과정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임시정부 인사들도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 사상범예비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 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점령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기에 발생한 대구 10ㆍ1항쟁, 제주 4ㆍ3항쟁 등 민중 항쟁에는 친일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국민을 탄압, 수탈한 데서 발생한 요인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통역정치'의 병폐도 많았다. 미군의 통역을 하면서 귀속재산을 가로채는 등 악덕 모리배가 횡행하였다.
미군정체제에서 입법기구는 1946년 2월 14일 개원한 남조선과도민주의원(민주의원)이 효시가 된다.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ㆍ김규식이 선출되었고, 좌익계를 제외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을 사퇴하면서 김규식이 대리의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ㆍ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사실상 기능이 정치되었다.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것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다. 1946년 미군정법령 제18호로 설치된 입법의원은 민선의원 45명, 관선의원 4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선의원은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이승만계열과 한민당계열이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 등 중도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ㆍ윤기섭이 선임되었다.
입법의원에서 심의제정한 법령이 50여 종이었는데 미군정은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간상배 처벌에 대한 특별법과 농지개혁법 등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입법은 공포하지 않음으로써 친일청산과 농지개혁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두 법안이 사산한 것은 한민당 출신의 입법의원들과 미 군정청 간부가 된 친일세력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