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결혼한 내가 술자리에 남아 있으면 '오늘 술 먹는 거 허락 받았어?'라든가, '남편은 괜찮대?'라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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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둘 다 술을 좋아하는 편인데, 결혼 초에는 각자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갈 때 은근히 서로 눈치를 봤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 화가 난 배우자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우리에게 익숙한 결혼의 레퍼토리였던 것이다.
실제로 결혼한 내가 술자리에 남아 있으면 '오늘 술 먹는 거 허락 받았어?'라든가, '남편은 괜찮대?'라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우리는 양해와 동의가 필요할지언정 허락을 구해야 할 사이는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남편도 '결혼한 남자가 이 시간까지 술자리에 있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한쪽이 좋아하는 걸 다른 한쪽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 차이가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연애할 때부터 서로의 술자리나 귀가 시간 때문에 다툰 기억이 거의 없다. 왠지 결혼 후에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아 신혼 초에는 혼자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가 친구들과 노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면 나는 기분이 나쁜가?
심심하고 외로울 때는 있지만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물론 공동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횟수가 잦거나 서로를 의심할 만한 여지가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는 공동으로 육아할 아이도 없다(함께 돌봐야 할 반려묘는 있다). 남편은 전날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셨어도 아침에 잊지 않고 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출근했다.
밤중에 내가 전화를 자주 걸지도 않지만, 그가 안 받거나 피하는 경우도 없었다. 물론 나 역시 술자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 마시는 일이 종종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음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지 '유부남, 유부녀'라는 이유만으로 결혼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 사람이 하룻밤 정도 집을 비운다 해서 공동생활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결혼을 계기로 온전한 독립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이라는 타이틀은 어쩐지 나를 부자연스럽게 옭아매고 있었다.
결혼한 여자의 '혼행'
결혼 전의 나는 혼자서 먹는 밥과 혼자서 가는 여행을 좋아했다. 남편을 만난 뒤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됐고 심지어 결혼까지 했지만, 더 이상 나 혼자서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난해 겨울에는 굳이 혼자서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은 나만큼 여행을 좋아하진 않는 데다, 프리랜서인 나는 직장인인 그에 비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편이다. 비행기 티켓이 싼 평일에 짧은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나를 그는 흔쾌히 이해해줬다. 남편도 고양이도 없이 혼자서 며칠을 보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외롭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내심 뭔가 잘못한 듯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나 역시 '결혼했는데 이래도 되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의 도덕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오려 노력한 내게 혼자 여행, 즉 외박한다는 사실은 왠지 '규율 위반' 혹은 '일탈' 같았고, 인생에 빨간 경고등이 번쩍 켜진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공동의 생활비를 개인적인 일로 사용한다 해도 딱히 거리낌이 없었는데, 막상 내가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그 돈을 쓴다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남편은 괜찮대?' 배우자의 '따로 여행'을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이 죄책감의 뿌리는 이미 결혼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만 홀로 둔 채 친구들과 여행 가는 걸 은연중에 금기라 여겼고, 그래서 친구들과 휴일을 보낼 때면 '결혼 전에 실컷 놀자'고 다짐하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결혼 후에는 할 수 없다'는 전제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고 있었던 거다.
결혼하고 나면 어디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또 낯선 이성과의 접점이 있던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미래의 남편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당연히 '결혼하면 못 하니까'라고 전제했을까.
결혼의 여러 제약 중에서도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거였다. 언제부터 내 안에 쌓여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내면적인 압박.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며느리에 대한 제약은 눈에 또렷이 보이기에 어떻게든 하나씩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결혼한 여자'라는 수식어에 잠재된 은연중의 제약은 나도 모르게 나를 잠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가 좋은데... 그럼에도 결혼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