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을 응시하는 이사영
지금여기에
남산 그리고 국가폭력
공관을 돌아 나와 남산 북쪽의 예장자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이었던 테라우치와 이완용이 한일병합을 조인한 '조선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보였다. 1939년까지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던 건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한일병합에 기여한 공을 기려 세웠다는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운 동상'은 이곳이 어떤 공간이었음을,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항변하는 듯했다.
'통감관저터'에 만들어진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의 비극과 아픔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사회공동체에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는 것은 결국 후대의 몫이다. 또한 흔적을 남길 수 없다 할지라도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결국 그와 같은 일이 다시금 벌어져선 안 된다는 사회의 의지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통감관저터에서 샛길로 빠지면 과거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주로 했다는 1국 건물 터가 나온다. 이젠 바닥에 있는 흔적조차 없는 공간의 빈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일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고문, 폭력 등을 당하고 긴 징역 생활을 했던 서병호는 부쩍 떨어진 체력에 힘겨워하면서도 이렇게 피해자들과 만나면 기운이 난다고 말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집에만 있으면 더 힘이 없어요. 이렇게 나와서 우리 선생님들 만나면 오히려 기운이 난다니까. 난 남산이 아니라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았지만 나중에 사상범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 남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 다 벌줘야 해."
눈이 감기는 순간 비극은 반복된다
1국 터에서 조금 내려오면 구 중앙정보부 본청, 지금의 서울유스호스텔이 있다. 1973년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사실 유스호스텔로 바뀌기 전 현대사의 인권유린을 기록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지금의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을 강행했다. 최종길 교수의 사망 이후 중앙정보국은 기존의 고문실을 모두 지하로 옮겼고 뒤이어 만들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의 창문 역시 좁아졌다.
아이러니한 건 당시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으로 문책을 받은 책임자들이 다음해인 1974년 탁본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이사영을 고문한 울릉도 조작간첩 사건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의 눈이 감기는 순간 비극은 반복된다. 그래서일까. 이사영은 건물 뒤편의 바닥을 탁본으로 남겼다. 흔한 시멘트 바닥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하고자 하는 곳의 특별한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