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대학에 가려면 수능 점수가 좋아야 한다. 직장에선 '순응' 점수가 좋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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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력이나 성과에 비해 만족할 만한 수준의 평가는 아니었지만 경쟁 트랙에서 빠져나오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척이나 화나는 상황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나름의 타협이었다. 난 매일 소위 '정시퇴근'하는 아주 소수의 간 큰 인간들의 선두에 섰다. 하지만 요즘 많이들 회자되는 '워라밸'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게 일과 삶의 균형은 맞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는 한다. 하지만 일 역시 삶의 일부일 뿐이다. 내 경우 점심시간을 빼고 하루 8시간을 노동하려면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해 최소 12시간을 써야 한다. 이 12시간은 오롯이 생계를 위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는 어렸을 적 들었던 말이 내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대학원 시절 전공에 거의 딱 맞는 분야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내'가 되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은 실험을 하고 결과를 내며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것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엔 내가 없어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 누구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기계처럼 돌아가는 조직에서 잠시 사용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고장나면 언제든 새것으로 교체하면 된다. 게다가 요즘엔 훌륭한 톱니바퀴들이 넘쳐난다.
때문에 생계를 위한 일에 소요되는 시간을 가능하면 줄이고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회사라는 곳에 내 몸과 사고력을 제공하고 그에 해당되는 급여를 받는 것이었기에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내맘대로 줄일 수 없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을 하려고 '정시'에 퇴근한 것은 아니다. 회사에 저당잡힌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을 뿐.
회사에선 이런 직원들을 두고 충성심과 희생정신이 없다고 한다. 이런 직원들은 관리자로 '성장'할 수 없다. 프로젝트 일정을 최대한 앞당겨 더 빠르고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도록 직원들을 가열차게 독려하는 '마름'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관리자가 된다. 그런 관리자들에게 나같은 존재는 매우 거슬리는 장애물이다. 자신의 일꾼들이 정시에 퇴근하는 나를 보며 딴 생각을 하게 되므로.
주변 동료들은 이런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다. 대체로 '저러다 어떻게 되나 보자' 지켜보는 쪽이 많았다. 자신들은 그럴 용기가 없다고도 했다. 최근엔 너만큼 워라밸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고도 한다. 그럴 때면 동료들에게 말해준다. 난 워라밸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난 일과 삶을 같은 선상에 놓지 않는다고. 일이 엄청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일도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내겐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회사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 5시에 함께 퇴근하는 동료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아주 가끔씩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을 때 보면 이젠 7시 이전에는 모두들 퇴근하는 것 같다.
10년 이상 꾸준히 나홀로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주 5일 근무가 시행되고 15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주40시간 노동이 일반화 되려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일하는 매우 상황 좋은 일부 노동현장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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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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