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독재타도를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6월 항쟁 시위군중들
박용수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라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개는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본능과 감각이지만, 민주화의 기억은 이성과 숙고가 필요한 영역이다.
성장의 성과는 눈만 뜨거나 길거리만 걸어도 그냥 확인할 수 있다. 건물과 도로와 교량과 집의 인테리어가 성장을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도시 그 자체가 성장을 보여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자 전시장 그 자체다.
그러나 민주화는 정치권 관련 뉴스나 시민들의 행동을 보고 성찰하거나, 관공서나 법원에 가서 일을 처리해 보고 판단해야 할 사안이다.
정교함이 필요한 민주화의 기억법
도시는 성장을 보여주는 상설 전시관이지만, 민주화의 기억과 현실은 전시되어 있지 않고 정치가들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하고 판단해야 알 수 있다. 성장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민주화의 역사나 기억은 누가 설명을 하거나 책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장과 달리 민주화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투쟁이었으며, 누구는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써야 하는 것이었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결코 동급이 아니고 동급이 될 수도 없다. 그래서 경제성장의 성과를 강조하고 과시하는 사람들과 달리 민주화를 강조하고 그 의미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매우 의도적으로 논리를 만들어서 그것이 오늘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을 해야 한다. 그러한 설명조차도 알려는 노력보다는 감각으로 세상을 판단하려는 세대들에게는 다가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성장을 선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방법이 필요 없지만, 민주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정 모두에 호소하는 정교한 방법이 필요하다.
성장의 전시장 그 자체인 이 거대한 도시에서 민주화를 기억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 공간을 확보하고 전시할 것들을 찾아내는 일도 돈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냥 굴러가는 일상에 적극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투쟁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나마 2016-2017 거대한 촛불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정도의 공간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처럼 온 도시에 혁명의 구조물과 혁명가의 흉상을 전시하는 방식이 민주화를 보여줄 수 있는 대안일까? 민주화를 기억하자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강압이자 일종의 문화적 폭력일 것이다. 후세대는 매일 구조물과 흉상을 보면서 학습을 하겠지만, 그것이 무슨 효과를 가질까? 민주화 투쟁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기념관이 도로와 건물들의 공간을 모두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화 기념관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들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육되어야 하고, 법관, 검찰, 경찰 그리고 공무원들의 행동, 시민의 참여를 통해 조용히 실천되어야 할 민주화의 역사가 교과서의 내용이 되어 암송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화 교육이 아닐 것이다. 행동과 발언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기억과 기념을 말한다면, 그것 자체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은 결코 행정 측의 기획, 관의 효율적 관리, 예산부처의 선심성 배려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민주화 관련 집단이나 가족들이 자신과 관련된 운동이나 개인의 행적을 과도하게 부각함으로써 혜택을 얻고자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기억과 기록 그 자체는 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이 법과 제도에 남아 있는 폭력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의 기록 모은 '기억의 저장고' 만들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