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7일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교육시민단체 회원들이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특권학교, 차별교육 반대! 자사고(자율형사립고) 폐지-일반고 전환 공약 이행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우성
애초 여론의 관심은 자사고의 폐지 여부였는데, 이젠 어느 자사고가 살아남는지에 쏠리고 있다. 지역 교육청마다 한목소리가 나올 수도 없는 데다 정부에 견줘 칼날이 무딜 수밖에 없어, 사실상 '반반'은 예상된 결과였다. 설마 정부는 절반은 이뤄냈으니 나머지 절반도 5년 후면 당연히 일반고로 전환될 거라고 여기는 걸까.
장담하건대, 결코 쉽지 않을 거다. 정부의 이른바 '점진적인' 방식의 자사고 폐지 정책은 살아남은 자사고에 '맷집'만 키워줄 뿐이다. '자사고 죽이기'에 혈안이 된 진보 교육감들의 운영성과평가를 당당히 통과했다는 명분 덕에 되레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당장 아이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평가를 통과한 자사고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예컨대, 여기 두 학교가 있다. 전북 상산고는 지정 취소되었고, 강원도의 대표적인 자사고인 민족사관고는 지난 1일 재지정 통보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두 학교의 차이는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들과 학부모 대부분은 자사고의 설립 취지와 평가의 내용, 점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적어도 그들에겐 살아남은 민족사관고가 일반고로 '전락한' 상산고보다 한 수 위인 학교다. 그들의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강고한 서열 의식 앞에선 자사고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듣자니까, 고등학생들이 'SKY서성한중경외시' 하며 대학별 순위를 매기듯, 이미 중학생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사고 간 서열'까지 따진다고 한다.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자사고 진학 열풍이 불고 있다는 뉴스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자사고의 이름과 합격생 수를 홍보하며, 아이들과 학부모의 환심을 사려는 사설학원 역시 부지기수다. 자사고 수가 줄어든 만큼 입학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고, 그만큼 소수 자사고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질 것이다.
자사고 출신은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도 하고, 일반고 졸업생과 결혼을 하게 되면 지인들에게 청첩장도 돌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회자한 적이 있다. 자사고가 명문대 진학에 유리하다는 것쯤은 차라리 덤이다.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게 권력으로 작용하듯, 이젠 자사고 출신이라는 것조차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신분증'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웃픈' 이야기도 있다. 일반고로 전환된 어느 자사고에선 동문회 모임도 따로 갖는다고 한다. 자사고 시절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일반고로 전환된 뒤 입학한 아이들을 후배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다. 수능을 통해 정시로 입학한 대학생들이 수시나 지역균형선발전형을 통해 들어온 이들에게 '수시충'과 '지균충'이라며 놀려대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점진적 접근법의 문제점... 정부는 교육청 뒤에 숨지 말고 앞에 나서라
일반고로 전환됐다고 해서, 자녀를 상산고로 보내려던 학부모들이 과연 눈을 돌려 일반고를 선택하게 될까. 그들은 입만 열면 '일반고의 교육 수준이 높다면 왜 그 비싼 등록금을 주고 아이를 멀리 자사고에 보내겠느냐'고 항변하지만, 그건 흰소리일 뿐이다. 그들에게 자사고와 명문대에 자녀를 진학시키려는 몸부림은 그저 '과시적 소비' 행위에 불과하다.
자사고를 정점으로 한 고교서열화의 폐해는 일반고에 그대로 전이됐다. 상위권 학생들을 모아 심화반을 꾸리는 일반고가 적지 않은데, 심화반 아이들은 일반고 내의 자사고를 자처한다. 자사고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한 아이는 스스로 '진골을 꿈꾼 6두품'이라며 자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반고에서는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그들을 특별 관리하는 것이다.
자사고가 우리 교육 현실에서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됐다. 사교육비는 증가했고, 입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교육의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극심해졌다. 그렇다고 '만 명을 먹여 살릴 도덕적 엘리트'를 길러내지도 못했다. 미꾸라지들 사이의 메기 역할을 하기는커녕, 스스로 미꾸라지가 되어 온 우물을 흐려버렸다.
이는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이른바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가 도입될 때부터 예견됐던 바다. 지난 9년 동안 고등학교는 다양화라는 미명하에 서열화했고, 서열화한 학교는 물과 기름처럼 철저히 분리됐다. 자사고 아이들은 비뚤어진 특권 의식에, 일반고 아이들은 분노하는 것조차 잃어버린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결국 자사고 문제의 해법은 하나다. 5년마다 운영성과평가를 하며 저들의 '내성'을 키워줄 게 아니라, 고르디온의 매듭을 끊어내듯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일괄적으로 일반고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법을 통해 밀어붙인 고교 서열화를 '점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인식은 나이브할 뿐만 아니라, 자칫 반격의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좋은' 자사고란 없다.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이기적인 욕망만 꿈틀거리는 곳에선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정부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돈으로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곳이 정상적인 학교일 수 있느냐'는 한 아이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디 정부는 지역 교육청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앞에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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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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