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표지
박은지
그 문장을 되새기며 나는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을 썼다. 이 책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남성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남성과 살면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려는 스스로를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쉽게 도망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게 '나의 일'이며 '우리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지 않은지,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는 관심이 왜 불편한지, 왜 명절에는 시가부터 가야 하는지, 아이는 왜 엄마가 키워야 하는지, 왜 직장 동료들조차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 아침밥을 챙기느냐고 묻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었다.
많은 남성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우리가 서로 무엇을 누렸고 무엇을 희생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 그들은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들에게, 우선 남성들의 권리부터 완벽하게 구축한 뒤에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볼지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왜 남성들은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불편함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을까. 페미니즘에 낯선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평범한 남성들은 그것이 일부 유난스러운 여성들의 주장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여성들을 배척하고자 함으로써,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이 모두 페미니즘의 극단에 서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동등해지기 위해 때로는 누리고 있던 특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의 삶만이 아니다. 우린 그저 서로를 동등한 잣대와 기준으로 바라보고, 차이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단순한 발상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에 대하여
가정이나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조금씩 향상되고 있고, 많은 남성들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역차별이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사회 변화를 멈추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판단이며, 누구의 기준일까?
그저 반걸음쯤 걸어나간 것으로 재빨리 변화를 끝내고자 하는 이유는 어쩌면 알면 불편해지고, 불편해지면 지금까지 누려오던 특권과 권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 상위 시대라며 '이 정도면 되었다'고 변화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은 여성 차별이 사라졌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기일 뿐이다. 적어도 여성 인권이 향상되었다고, 이쯤이면 되었다고 선을 긋는 것이 남성들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시어머니 시대보다 요즘 며느리들은 편하다, 예전에 비해서 나아졌다'는 것이 '이제 충분하다'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문제는 서로가 살아보지 않은 삶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상대가 겪은 불편함을 내 것보다 쉬운 일로 폄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남성들이 예전의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동등한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함께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집안일을 함께한다는 이유로, 혹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하지 않거나 성 접대를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정도면 좋은 남자' 혹은 '훌륭한 남편'이라고 칭찬받는다. 회사 일과 집안일을 병행해도 칭찬은커녕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이 강요되는 여성들과는 다른 기준점이다.
'당연한 기준'이란 현재의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분명히 좋은 남자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걸 당연하게, 동등한 시선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기준이다.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넘어 우리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다 자유롭게 그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난 페미니스트일까
페미니즘은 결국 평범한 보통 여성들이 여태까지 평생 느끼며 살아온 일상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으로 서두를 떼며, 무언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여긴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은 점차 어렵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속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설명과 노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는, "이건 뭔가 좀 불합리해"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워마드가 아니며 남성혐오를 하지 않는다' 따위를 먼저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치녀'나 '맘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했던 여성들이 이제는 페미니스트지만 워마드가 아니며, 혹은 순종적이고 다정한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가 예민한 사람, 유난스러운 사람, 여성이 우위에 서길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편견은 우리를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또 다른 한계 안에 가두고 만다.
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은 채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여성들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서 함께해온 여자 친구와 아내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취하는 행위일 뿐이다. '여자라서 힘들어? 남자는 더 힘들어!'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내 가족과 친구가 페미니즘으로 얻고자 하는 공정한 권리와 선택에 대하여 일단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책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에서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서로가 견고하게 쌓아온 세계를 들여다보고 때로는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는 솔직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우리가 서로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짐작하고 공감하려 노력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나를 한 박자 보호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무엇이라 명명하든 그저 여성으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때때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를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종종 한국 사회의 여성 대표와 남성 대표가 된 것처럼 부딪쳤다. 하지만 그때 일어난 균열로 인해 우리는 견고했던 상대방의 세계를 조금씩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원치 않는 역할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온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더구나 한 쌍의 남녀로서 손을 잡고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즘이 필요했다.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 명확히 설명 안 되는 불편함에 대하여
박은지 (지은이),
생각정거장,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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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얘기만 나오면 왜 남편과 싸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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