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좋은 맘으로 봉사하러 아파트 동대표가 되었다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개혁하려고 나선 사람들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일까? 물론 기득권세력, 즉 아파트 관리비를 자기 맘대로 쓰고 불필요한 공사를 남발하며, 상식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혹은 관리소장)과 대결할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그것은 아파트 입주민들의 무관심을 접했을 때다. 나도 그랬다. 3번씩이나 나에 대한 불법 해임투표가 진행된 2016년 초, 억울함을 호소하고 재판의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직접 주민들에게 서명받으러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때론 참여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문전 박대하는 주민들도 상당했다.
이럴 때면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다. 결국엔 나의 이 수고와 헌신으로 자신들이 혜택을 입게 될 텐데 나를 잡상인 취급하다니, 그리고 따지고 보면 당신들의 무관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적폐 세력들은 맘 놓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봐라, 너를 돕는 사람이 있을 거 같냐'며. 그래서 상식적인 동대표들은 외롭고 괴로워하다 결국 병이 나서 포기하고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그럼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번 물어야 한다. 왜 입주민들이 무관심할까 하고. 첫째는 주민들의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생업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은 관리비에까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집에 오면 쉬고 싶다. 동대표가 되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여하거나 입주민으로 회의에 참관하는 건 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 다른 원인은 무임승차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중요하고 필요한 건 알겠는데, 누군가 하겠지, 하는 것이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절박한 이유를 못 찾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공동 책임은 무책임인 것이다(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
아파트의 특수성
이것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기가 내는 관리비를 도둑질해가거나 각종 공사를 엉터리로 하면 결국 건물 가치가 떨어져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하는데도 무관심한 이유 말이다. 그 이유는 아파트라는 부동산이 가진 특수성에서 찾아야 한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이 자동차를 잘 관리하는 것, 즉 엔진오일을 제때 갈고 타이어의 공기압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세차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제값 받고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된 관리가 자동차의 재산 가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반면 아파트의 가격은 아파트 건물관리가 아니라 '위치'가 좌우한다. 아파트 주변에 전철역이 들어서거나 도로가 나면 가격이 올라간다. 아파트 건물 상태와 무관하게 말이다. 이런 까닭에 아파트 주변에 전철역이나 도로 설치 혹은 공원 설치에는 모두 나서서 서명도 하고 바쁜 와중에 시청까지 찾아가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아파트 관리에는 무관심한 것이다.
게다가 아파트의 건물 관리상태가 더 나빠야 재산 가치가 올라가기까지 한다. 아파트 수명이 20년 가까이 되면 입주민들의 관심사는 '재건축'으로 옮겨 간다. 재건축의 가능성이 높을수록 아파트의 재산 가치는 상승한다. 아파트 건물관리를 제대로 해서 재산 가치를 유지·보존하는 것보다 아파트를 빨리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재건축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건물상태가 안 좋아지고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야 안전 진단 통과가 쉬워진다. 요컨대 아파트 건물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을수록 재건축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파트 가격이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위치와 무관하게 건물 가치로만 결정되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서 교통시설이 확충되어 더 편리해지고 공원이 들어서서 더 쾌적해지는 가치, 즉 사회가 만든 가치를 공공이 환수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건물을 잘 관리하려고 할 것이고 그만큼 입주민들은 아파트 관리에 관심 갖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건물이 낡고 위험해져서 재건축을 한다고 해도 개발이익을 누리기 어렵다면 어떻게 될까? 재건축을 최대한 늦추는 동시에 건물을 잘 관리하여 오래도록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당연히 아파트 관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보는 부패와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부동산 불로소득
정말 뿌리 깊은 원인은 부동산 불로소득에 있다. 재건축을 앞당겨서 개발이익인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을수록 아파트 관리비가 제대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아파트 공동체 활동에 무관심하다. 재건축 바람이 불어 가격이 오르면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궁리를 한다. 참여해서 주민들과 함께 꽃을 심고 물을 주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하는 건 관심 밖이다.
작년 8월에 아파트에 사고가 났을 때 일이다. 아파트 맨 뒷동에 부착되어 있던 배기덕트가 분리되는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우리 아파트 주민들의 대다수는 혹시 건물이 붕괴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아, 건물이 무너져야 했었는데, 그래야 재건축 허가가 떨어지는데"라고 하는 입주민들도 상당했다. 재건축으로 인한 개발이익을 기대할 수 없으면 건물 붕괴는 엄청난 손실이나, 개발이익이 기대되면 건물 붕괴는 엄청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면으로 보아도 입주민들이 아파트 관리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많지 않다. 이런 까닭에 입주민들 안에는 관리비 횡령과 각종 공사 비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1만 원 더 낼 테니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부의 무관심은 어찌 된 일인가? 국민의 70%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 갈등과 비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심지어 자살 혹은 살인 사건도 일어나는데, 어찌해서 이다지도 무관심할까? 그것은 유권자인 대다수 입주민이 이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으로부터 입법 요구가 강했다면 국회(의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3~4년 전에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들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시간이 안 되어 듬성듬성 참여했지만, 열심히 참여한 사람들은 여러 차례 가진 집중 토론 끝에 나름대로 좋은 대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책 대안을 공론화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섭외해서 토론회를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에게 아파트 관리부실과 부패와 갈등은 앞다퉈 입법 경쟁이 벌어지는 매력적인 주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국회가 부동산 불로소득을 근절하는 대책, 아파트가 사는 곳이 아니라 부의 증식 수단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대책을 세워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지금의 국회로는 그것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원인의 전모
실상이 이러하므로 일이 몰리는 곳은 기초 지방자치단체다. 기초 지자체에서 아파트 관리를 담당하는 공동주택관리과는 업무 과부하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대표 분쟁과 관련한 민원 때문이다. 시청 공무원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부서가 공동주택관리과라고 할 정도다. 수원시의 경우는 5명이 시 전체 아파트 관리업무를 관장하고 있는데, 이 인원 가지고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민원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다.
공동주택관리과 공무원들은 막말하는 입주민들에게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비리를 발견하고 그걸 해결하려다가 낭패를 보는 동대표와 입주민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시청이다. 담당 공무원은, 억울한 맘을 부여잡고 시청으로 달려와서 이렇게 비리가 생겼는데 왜 공무원이 가만히 있느냐, 처벌해야 할 게 아니냐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론 비리의 주체들이 속이 뻔히 보이는 미끌미끌한 거짓말도 듣고 있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수원시의 아파트 행정은 신기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다른 시군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민원을 제기하면 사적 자치이니까 알아서 하고, 법적으로 문제 있으면 사법기관에 가서 심판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왜 그럴까.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동대표들의 비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주민 30% 동의를 받아 시청에 감사를 청구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다. 감사결과보고서에 비리와 불법행위가 지적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법과 시정명령 사항을 바로잡으려면 감사를 청구한 동대표와 입주민이 다시 나서야 한다. 이런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비리 주체들은 감사결과보고서에 자기들의 불법적 관리비 지출이 드러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행정부서인 경찰과 검찰도 마찬가지다. 내가 약 30여 차례 경찰서와 검찰청에 조사받으러 들락거렸지만, 어찌해서 아파트 동대표들은 고소와 고발을 남발하고 입주민들끼리 재판까지 가려고 할까, 하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일을 짜증 내며 처리할 뿐이다. 어떤 땐 할 일없는 사람 취급받기도 한다. 즉, 시간이 남아도니까 동대표를 하고 경찰과 법원을 들락거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016년 3월엔가 나를 괴롭히는 '몸통'을 고소하기 위해 수원지방검찰청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접수 직원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는 내게 "검찰이 얼마나 바쁜데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 고소장을 접수합니까. 이건 행정 낭비입니다"라고 하기까지 했다.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렇게 우리는 어찌해서 아파트에 갈등과 비리가 창궐하고 계속되고 있는지 원인의 전모를 파헤쳐 봤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걸까? 물론 있다. 갈등을 현저히 줄이고, 공동체를 활성화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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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전 국민 주거권과 토지공개념 실현, 토지보유세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인 토지배당제를 위한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2023, 공저), 《아파트 민주주의》(2020),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2018, 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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