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한 아파트 단지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4년(2015.10~2019.9)의 경험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전반기 2년은 인생 최대 고난의 시기였다면, 후반기 2년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이한 사례다. 적폐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아파트 내에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고, 수원시의 적극적 행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법률 지원을 해준 법무법인 '에셀'의 오재욱 변호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 변호사는 직업 그대로 나의 '변호인'(advocate)이었다. 내가 아는 많은 아파트 투사들은 적폐세력과 싸우다가 병들고 이사 가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승리해서 아파트를 건강하게 바꾸었더라도, 다시 엉뚱한 사람이 들어와 나빠지는 경우가 상당했다.
'아파트 분투기'가 알려지자 아파트 동대표 혹은 회장을 할지 말지를 내게 의논해오는 사람들이 꽤 된다. 그러면 나는 그 아파트의 상황을 묻는다. 너무 심각한 경우에는 하지 말라고 하고,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덤벼볼 만하다고 하면 혼자 하지 말고 맘 맞는 사람 2~3명과 함께 하라고 조언했다. 물론 평온한 상황이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4년간의 경험 통해 얻은 유익
"당신은 입만 열면 정의를 말하면서 왜 마을 일에는 관심이 없냐?"는 지인의 충고에 마음이 찔려 시작한 회장 4년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만남'이다. 내가 회장을 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만남은 나와 사회관이 많이 다른 입주민과의 만남이다. 그가 나에게 준 도움은 컸고,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아파트 상가 내에 치맥집 사장과 인테리어 사장, 정육점 사장과의 만남도 생각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겼던 그들은 중요한 정보를 아파트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스피커 역할을 했고, 아파트의 돌아가는 상황을 내게 전달해 주기도 했다.
또 '나비정원'을 하면서 만났던 중고등학교 아이들, 함께 꽃을 심고 물을 준 주민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놀이터개선위원회에서 만난 젊은 엄마들의 헌신도 생각난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시인, 30세가 된 장애를 가진 딸을 돌봐야 하는 아저씨도 만났다. 그 아저씨는 내가 악몽에서 빠져나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아파트 내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함께 동대표를 했던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도모한 경험도 참 귀했다. 또 온종일 손자를 돌봐야 하는 정 많은 아주머니도 만나 일을 도모했다.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여 서명을 받아준 우리 아파트의 세월호 활동가 주민들, 우리 아파트 주민이 아님에도 우리 아파트의 공동체 운동을 돕기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조안나 선생과의 만남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시청 공동주택관리과 공무원들과의 만남도 떠오른다. 지금은 부서를 옮겼지만 상식을 세우기 위해 애썼던 이상백 주무관의 적극적 행정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고, 배기덕트 재난사건 때 투혼을 발휘한 최연경 팀장과의 만남도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기억이 안 좋은 만남도 있었다. 아파트 운영은 어떻게 되든지 내 알 바 아니고 오로지 아파트값 안 올라간다고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만남은 내가 아파트 회장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만남으로 나는 넓어지고 깊어졌다. 만남은 축복이었다. 아픔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또 하나의 유익은 경찰과 검찰과 기초지자체와 법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에 나는 고소와 고발,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했다는 것의 의미도 잘 몰랐다. 그러나 내가 당사자가 되어 보니 그 뜻을 바로 알게 되었다. 지자체의 행정 방식도 알게 되었다. 고소·고발을 당하기도 하고 직접 고소·고발을 하기도 해서 이제 고소장과 법원에 제출하는 준비서면도 어느 정도 작성할 줄 아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주민자치의 현주소
회장 4년을 통해서 나는 우리나라의 주민자치 혹은 마을만들기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주민자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지금의 주민자치는 '일부' 주민들의 참여로만 진행되었다. 물론 일부 주민들은 자영업자가 다수다. 이런 상태에서 추진하는 주민자치와 마을만들기가 얼마나 효과적일지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민자치와 마을만들기 활동이 '아파트'를 간과한다는 점이다. '마을만들기' 하면 시골 동네의 정자가 떠오르고 단독주택과 빌라가 있는 골목이 생각나지만, 사실 도시에서의 주된 주거 형태는 아파트다. 수원시만 해도 85%가 넘는 시민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 운동은 건강한 아파트 자치운동을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지자체는 아파트를 여전히 막연한 '자치영역'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지금 아파트에서의 자치란 사심(私心)으로 가득 찬 회장이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이 현실인데도 말이다. 주민자치운동, 마을공동체 운동이 답보상태에 빠진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시에서의 주민자치운동은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들이 동대표가 되어 아파트 운영에 참여하고, 다양한 자생단체들이 나올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아파트 공동체 운동 없는 주민자치운동은 허상이다. 요컨대 아파트의 운영제도를 개혁해서 주민자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촛불 시민들에게 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