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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우금치전투에서 참패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67회] 우리나라 전사사상 우금치전투만큼 처절했던 격전은 일찍이 없었다

등록 2020.02.16 16:43수정 2020.02.1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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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김개남이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계속 패퇴의 길을 걸을 즈음, 전봉준은 동학북접군과 협력하여 한때 충청도 일부와 경기도 일원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의 국정을 농단하고 관군을 앞세워 동학농민군의 섬멸에 나서면서 남접은 힘을 모아 관군ㆍ일본군과 싸웠다.

남접의 동학군은 북접의 참여로서 그야말로 100만 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다. 당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 측의 동학농민군은 관군은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을 뽐내는 일본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방아치 전투 전 진을 친 장소 김개남 북상 후 방아치 전투를 위해 진을 친 곳
방아치 전투 전 진을 친 장소김개남 북상 후 방아치 전투를 위해 진을 친 곳심국보
 
10월 9일(음력) 삼례 재기포 이후 10월 12일(음력)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15일(음력) 충청북도 청풍 부근에서 충주지방 경비병이 동학군 수령급 이하 30여 명을 살육하고 화승총 2,000정과 화약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5일(음력)에는 대구 병참부의 일본군이 성주에서 동학군 11명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앞서 11월 12일 보병 제19대대가 경성에서 출발해서 학살전에 투입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 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스쿠로 미츠마사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120년 전 희생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전투를 재현한 우금치 극단의 마당극
120년 전 희생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전투를 재현한 우금치 극단의 마당극김종술
 
학살부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정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 측 교도 중대, 그 밖의 일본군 수개중대와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 전투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점차 패퇴의 길로 빠져들었다. 북접 역시 남접과 같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우금치를 둘러싸고 4, 50여 회에 걸쳐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ㆍ일본군과의 전투는 시산혈해를 이루는, 그야말로 동학농민혁명사상 최대의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논산방면으로 후퇴하면서 제2차 무장봉기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동학농민혁명은 좌절의 늪에 빠져들었다.

12월 7일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 관군 사이에 벌어진 우금치(牛金峙) 전투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싸움이었다. 이인리에서 공주읍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우금치다.


우금치란 이름은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가 없는 고개, 즉 '우금치(牛禁峙)'의 금(禁) 자가 금(金)자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있어 소(牛) 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이날의 전황을 관군의 선봉장 이규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북 고부 주산마을 <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주산마을은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했던 곳이다.
전북 고부 주산마을 <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주산마을은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했던 곳이다.정만진
 
판치(板峙)에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具相祖)는 8일 오후 2시께 적도 (동학농민군) 몇 만 명이 경천(敬天)에서 판치를 향해 올라오고, 또 다른 한 부대는 노성(魯城) 뒷봉을 타고 올라오는데, 포성이 진동하고 오색기를 휘날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다고 하였다. 또 이인(利仁)에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泳)의 보고에 의하면, 비류(匪類 · 동학농민군) 몇 만 명이 논산에서 제를 넘어 몰려 오고 또 몇 만 명은 오실산(梧室山) 쪽으로부터 우리의 후방을 포위하려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판치의 구상조군은 효포ㆍ능치(孝浦ㆍ崚峙)로 후퇴시키고, 이인의 성하영은 동학농민군에 저항하여 불소한 희생을 보고 우금치로 후퇴하여 일본군 삼미아일(森尾雅一) 대위 부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이날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로 육박하여 대치하였다.


9일 평명(平明)에 적진 (동학농민군 지역)을 바라 본 즉 잡기(雜旗)를 꽂고 동쪽의 판치 뒷봉에서 서쪽의 봉황산 후록에 이르는 3, 40리에 걸쳐 산위에 진을 치고 있는데 사람으로 병풍을 두른 것 같이 그 세가 떨치고 있었다. (주석 1)


12월 6일 이인리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10만 병력은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끈 관군과 일본 정예부대를 맞아 싸워서 크게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튿 날부터는 공주성을 앞에 두고 우금치에서 쌍방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완전무장한 일본군은 이날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하고 있었다. 서편을 향해 일본군은 뒤쪽에서 해뜨기를 기다렸다가 진격해오는 동학농민군쪽으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우금치 고개에 세워진 동학군 위령탑 우금치 고개에 세워진 동학군 위령탑
우금치 고개에 세워진 동학군 위령탑우금치 고개에 세워진 동학군 위령탑한길사
 
동학농민군은 눈이 부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연신 언 땅 위에 고꾸라졌다. 일본군은 1대가 총격을 가하고 물러서면 2대가 나가 재차 기어오르는 동학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시체 위에 또 시체가 쌓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죽어갔다.

교활한 일본군은 민가를 뒤져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깨에 동학깃발을 꽂은 다음 총을 숨겨 동학농민군에 접근하였다. 우군인 줄 알고 반가와 다가가는 소박한 동학농민군들에게 일본군은 사정없이 총격을 가했다. 우리나라 전사사상 우금치전투만큼 처절했던 격전은 일찍이 없었다.
 
 
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 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
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이승철
 
우금치에서 7일 동안 전투가 계속되어 하루에도 4~50 여 차례나 이 고개를 뺏고 빼앗겼으며 종내에는 2만 여 명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5백 여 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쓰러진 동학농민군 시체로 하얗게 덮혔고 산밑 시엿골 개천은 여러 날 동안 줄곧 핏물이 홀렀다. (주석 2)


주석
1> 이규태(李圭泰),「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최현식,『갑오동학혁명사』, 182~183쪽.
2> 조경환,『역사의 고전장』, 222~223쪽, 삼조사, 1979.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우금치전투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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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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