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철거 요구하는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우연'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2019년 12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앞 소녀상 부근에서 열린 '위안부 동상 철거, 수요집회 중지 요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회견은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국사교과서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권우성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는 그동안 낸 책들과 달리, 사전에 계획하거나 구상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레 쓰게 된 책이다. 작년 8월 초순 오마이뉴스 편집부로부터 '조국 전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쓴 비평 때문에 이영훈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가 화제가 되고 있으니, 이 책에 대한 글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조국이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이라고 말한 까닭'이란 8월 8일자 기사를 쓰게 됐다.
☞ 조국이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이라고 말한 까닭 http://omn.kr/1kbht
그 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 기사를 연재하는 게 어떻겠느냐?'라는 또 다른 제안을 받고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다'라는 오마이뉴스 시리즈물을 쓰게 됐다. 이 시리즈는 금년 1월 13일까지 연재했다.
위 시리즈가 시작된 직후,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안을 받았다. 이에 따라 출간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쓰게 됐고, 시리즈가 종료된 뒤 기사 전체를 재구성하고 내용을 수정해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를 내게 됐다. 기사를 쓸 때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글을 썼기 때문에, 시의성이 덜한 일반 도서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하고 수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너무 터무니없어 당혹
<반일 종족주의>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 책에 담긴 역사왜곡을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 못지않게 항상 부담스럽게 따라다닌 것이 있다.
여타 분야보다 객관성을 더 중시하는 경제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썼기 때문에, 그들이 근거를 갖고 글을 썼으리라고 누구든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부분을 비판할 때는 한번 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경제학자인 그들이 그처럼 터무니없는 글을 썼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쉽게 믿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청구권 문제에 관한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강제노역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종결됐다'는 일본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공동 저자인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는 이 책 제10장에서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습니다"라며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라고 한 뒤 "이게 팩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주익종은 서울대에서 한국 경제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엄격히 사실을 추구하는 경제사 분야의 학자가 "이게 팩트입니다"라며 확신을 보였다. 학자가 이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면, 그것도 책을 통해서 그렇게 하면, 웬만하면 더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런 확신으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독자들에게 '진짜 팩트'를 제시하려다 보니,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익종의 말은 팩트가 아니다. 그가 말한 청구권 협정은 강제노역과 관련없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노역 손해배상 판결에서 설명한 것처럼, 청구권협정이 다루는 것은 해방 당시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간 재산과 한국인이 일본에 두고 온 재산에 관한 청구권 문제였다. 이 청구권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협정이었다.
만약 한·일 간에 불법적 강제노역으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려면, 일본이 불법행위의 존재 사실을 인정한 뒤 양국이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절차가 필요하다. 불법행위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법리상 불가능하다. 가해자가 자신의 폭행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피해자와 합의를 끝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까지도 강제노역에 관한 불법행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강제노역 문제가 해결됐을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판결이다.
법학자는 아니지만 강제노역을 연구했으므로 그것에 관한 법리를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었을 주익종이 "이게 팩트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했으니, '이게 팩트라는 말은 팩트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데 부담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강제노역을 연구한 경제학자가 기본 법리도 검토하지 않고 책을 썼으리라고 생각할 독자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대담한 이영훈의 주장
이런 부담감은 이영훈 교수의 글을 비판할 때도 번번이 느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글을 다룰 때 특히 그랬다.
<반일 종족주의> 제23장에서 그는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1924~1996)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그는 모리카와 마치코 작가가 3년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집필한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일대기를 근거로 '위안부 문옥주는 성노예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영훈은 문옥주가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서 "헌병에 잡혀갔다고 했지만,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합니다"라며 "어머니나 오빠의 승낙 하에 주선업자에 끌려간 것을 그렇게 둘러대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영훈이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를 근거로 설명했기 때문에, 독자들 상당수는 그가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문옥주가 어머니나 오빠의 승낙을 받고 주선업자한테 끌려갔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상당수의 독자들을 상대로 '이영훈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려니,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비치지 않을까 하고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문옥주가 어머니나 오빠의 승낙을 받았다는 근거는 그의 일대기 어디에도 없다. 그가 주선업자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위안부로 끌려간 1940년 가을 어느 날, 16세 된 문옥주가 겪은 일은 분명히 일본군에 의한 납치였다.
위 일대기에 따르면 문옥주는 납치 당일 하루코라는 한국인 친구 집에서 놀았다. "그날도 하루코네서 놀다가 저녁이 되어, 걸어서 이십 분 정도 되는 거리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너 여기로 잠깐 와' 하는 소리에 놀라서 멈춰 섰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위안부로 납치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를 불러 세운 사람들은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헌병, 조선인 형사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처럼, 그가 군인과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된 게 확실하고 이 진술을 뒤엎을 근거가 없는데도, 이영훈은 문옥주가 승낙을 받고 주선업자에 의해 끌려갔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대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영훈은 문옥주가 위안부 생활로 2만 6551엔을 벌었다고 주장했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군 육군 중장의 4년 6개월치 연봉에 해당한다. 평소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감했건 안 했건 간에, 위와 같은 주장을 들으면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 뭔가 근거가 있으니 그렇게 주장했겠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절묘하게 진실을 비껴간 것'이다. 1992년 5월 13일자 <한겨레> 기사 '일제 종군위안부 군사우편저금, 일(日) 저축금 원부(에)서 확인'에 따르면, 문옥주의 월급이 우편저금 형태로 적립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돈은 문옥주 본인에게 가지 않았다. 우편저금 형식으로 쌓여 있었을 뿐이다.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직후에 문옥주는 체불 임금을 찾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일본에 가서 1992년 5월 11일 체불 임금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절 당했다. 2016년 5월 17일자 <연합뉴스> 기사 '위안부 피해자 고 문옥주 증언, 기록 일치'에도 보도됐듯이, 그는 끝내 그 돈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문옥주 일대기도 연구하고 이것저것 조사했다면, 그가 강제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해 일본에 건너가 항의까지 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영훈은 그가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는 허위 주장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