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독립신문
송유미
서재필의 한글전용에 대한 의지는 창간호 논설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보게 함이라."가 바로 그것이다.
서재필은 국제정세에도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5월 막부의정서의 비밀조약을 조인했다. 조선의 남북분할과 조선을 양국이 갈라서 보호한다는 비밀조약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이를 폭로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논설을 쓴 부문은 국민의 계몽과 민권의식이었다. 열강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자각하고, 서구 나라들처럼 국민의 선택에 의해 집권자가 결정되는, 민주공화주의를 배양코자 하였다.
"우리가 바라건대 정부에 계신 이들은 몸조심도 하고,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거든 관찰사와 군수들을 자기들이 천거 말고 각 지방 인민으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뽑게 하면 국민간에 유익한 일이 있는 것을 불과 1, 2년 동안이면 가히 알리라." (주석 17) 라고 국민의 직선제를 제창하였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있을 때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영국 왕립 지질학회 이사벨 버드 비숍은 그의 여행기에 『독립신문』과 관련 내용을 담았다.
관련 신문이 나와 사회의 진상을 가리킴 받자 국민들은 미몽에서 벗어나 관리의 악정과 재판의 부당함에 엄정한 비판을 해서 여론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신문이 나오자 뒤 컴컴한 부정을 태양 앞에 내세워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교육과 정당한 개혁을 장려하며, 인지의 개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부정한 관리와 불량한 관원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면서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발행자 제이슨(서재필) 박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신사로 진심ㆍ성의로 그의 조국을 번영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신문배달원들이 이 국문신문을 한 아름씩 옆에 끼고 거리를 지나가는 광경과 상점마다 그 신문을 읽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실로 1896년 이래의 새로운 현상이었다. (주석 18)
주석
14> 이정식, 앞의 책, 204쪽.
15> 서울대 정치학과 독립신문 강독회, 『독립신문 다시 읽기』, 17~18쪽, 푸른역사, 2004.
16> 『독립신문』, 2권 92호.
17> 『독립신문』, 1896년 4월 14일치, 논설.
18> 송건호, 『서재필과 이승만』, 157~158쪽 재인용.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