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장녀 박재옥 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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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재옥의 울부짖음
이튿날 오전 조카 박재석이 구미에서 면회를 왔다. 할머니는 병석에 누워 있기에 대신 왔다고 했다.
"삼촌요, 할매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막내야, 닌 어째든동 살아라' 그 말 뿐입디다."
조카가 떠난 그날 밤 또 한 여인이 떠올랐다.
"되련님(도련님), 이 세상을 확 뒤집어 엎으려면 우야든동 살아서 힘을 기르시이소."
맏형 부인인 선산김씨 형수였다. 박정희가 일군 패잔병으로 풀이 죽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어느 날이었다. 뒷산에서 망태에 갈비를 한 짐 지고 내려오는 형수가 눈이 어두워 돌부리에 넘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장면을 봤다. 그 무렵 형수는 영양실조인데다가 가난으로 제때 병원 치료를 한 번 받지 못해 시력을 잃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때 큰 충격을 받고 그 며칠 후 선산에 사는 김재규와 같이 다시 군문에 입대하고자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찾아갔다.
"아부지! 죽으면 안 돼요. 전 누굴 믿고 살라는 말입니까?"
큰 딸 재옥이의 울먹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 무렵 어린 딸은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아무튼 박정희는 딸에게 못쓸 짓을 했다.
그 며칠 전 북에서 내려온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창륜의 말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이보라우 박 소령! 우리 속담에 '개 꼬리 삼 년을 두어도 황모 못 된다'는 말 들어봐서. 네레 지금은 갸들이 받아주지만 곧 개털이 될 기야."
또 한 사람이 눈에 밟혔다. 그 전 해 춘천 8연대 경리장교 박경원 대위의 결혼식에 갔다가 서로 눈이 맞아서 동거 중인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생이었다. 그가 체포되던 그날 아침도 누군가 곧 연행될 거라 귀띔했지만 그 여인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그 다섯사람의 환영(幻影이 박정희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 순간부터 박정희는 수사관들도 놀랄 정도로 남조선노동당 조직체계와 조직책 이름을 낱낱이 다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