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을 뜻한다.
진실위 자료사진
1979년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야당 대표인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박탈시킨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들의 "유신철폐" 시위가 시작됐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들이 참여하고 18~19일에는 마산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참여자 1058명을 연행했고 마산지역에서 18일과 19일 사이 시위참여자 505명을 연행했다. 20일 자정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연행자들을 민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부마항쟁으로 불린 이 사건은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궁정동에서 살해함으로써 유신독재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당시 계엄사령관 박아무개는 지난 2010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 조사에서 "(그때) 공수특전단 1, 3, 5 여단과 해병대 1개 연대가 투입되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부산 일원에 선포된 계엄령에는 총 6615명의 군 병력 중 특전사 2개 여단 2604명의 병력이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과 인권침해
가내수공업자였던 김아무개(24)는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무차별 폭행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9일 퇴근 후 부산 구시청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버스가 오지 않자 남포동 방향으로 이동하려고 시청 앞에 있는 육교를 건너려고 하는 중, 계엄군이 제지해 '왜 버스를 못 타게 하느냐'고 항의하자 '이 새끼 우리가 누군데'라고 욕을 하면서, 무장군인 2명이 나의 어깨를 뒤로 꺾고, 다른 무장군인 1명이 '건방진 새끼'라고 말하면서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세 차례 강타했다.
내가 바닥에 뒹굴자 '개새끼 엄살 부리지 마' 하면서 욕설을 하고, 옆에 있던 군인에게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을 명령한 후 군홧발로 나의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했다. 나는 그 충격으로 잠시 실신하게 되었고, 실신 후에 눈을 떠보니 부산시청 정문 옆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러다 내가 복부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나의 몸을 구타했다."
당시 금은방 직원 전아무개(29)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8일 저녁 7시경 나는 친구와 함께 부산 서면 로터리에서 태화백화점 방면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했는데 포진해 있던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다. 그때 나는 한독병원 맞은편에 있던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해 실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나는 실신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해 인근에 있는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었으며, 바로 그날 두개골 부위에 대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계엄군의 구타로 인해 두개골 함몰분쇄골절과 앞 치아 여러 개가 뽑히거나 부서졌다."
당시 마산경찰서 전투경찰 서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해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 경남대 3학년 최아무개(여, 24)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8일 3·15탑에서 약 300~400명 가량의 학우들과 스크럼을 짜고 구호와 애국가 등을 불렀다. 내가 시위대 앞쪽에 있는데 '요년들' 하면서 갑자기 경찰관 3-4명이 달려들어 치마를 올려서 얼굴에 덮어씌운 채 머리카락을 뒤에서 움켜잡고 찔찔 끌고 갔다. 치마를 들어 올려 얼굴을 덮어씌워서 나의 아랫부분은 속옷이 다 드러나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로 시멘트 바닥에 눕혀진 채로 끌려갔다."
경남대 3학년 옥아무개(여, 22)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시위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사들이 달려들어 옷부터 찢어 내리고 끌고 갔다. 형사들이 대열 앞에 있는 나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잡아당겨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자 형사가 나의 바지 안쪽으로 손을 들이밀고는 더듬더니 나의 바지를 허벅지 쪽으로 해서 찢었다. 속살과 속옷이 다 드러나 거의 실신 상태로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나는 찢어진 바지를 입은 채 지내며 조사를 받았다."
부산대 3학년 이아무개(21)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온천장 파출소 2층으로 기억되는데, 양손과 양발을 묶고 양손과 무릎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우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얼굴에 젖은 수건을 씌우고 와사비 물이 든 주전자를 코에 부어대면서 '배후를 말해라, 김영삼이 돈을 주더냐. 누가 시켰냐. 얼마를 주었냐'며 추궁했다. 그리고 부산 보안부대에서는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힌 다음에 큰 방으로 데리고 가 발로 차면서 밟기 시작했다."
"석방 후 치료받았더니 정신분열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