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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은 이렇게 죽었다... 조국의 국민에게 호소한다"

[인터뷰] 박정희 정권 의문사1호 최종길 교수 동생 최종선

등록 2020.04.15 10:58수정 2020.04.1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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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현장 모습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현장 모습의문사위 자료사진
 
1973년 10월 16일 최종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하 서울법대)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직원이자 막내 동생인 최종선과 함께 조사를 받기 위해 중정에 자진 출두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19일 새벽, 최종길 교수는 중정 건물 앞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관련 기사 : 참혹하게 맞아 죽은 서울대 교수... "적당히 덮자"는 검사 )

당시 중정에 근무한 동생 최종선은 형님의 사망을 통보받고 또 사체가 있던 장소를 직접 보고 타살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최종길) 형님의 죽음을 이렇게 헛되이 덮어 버릴 수는 없다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그 즉시 (중정) 정문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그는 최종길 교수의 시신이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갔다. 그러나 그곳 입구에서부터 미리 나와 감시 중이던 중정 직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그들을 뿌리치고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서울시내로 들어갔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는 어디로 갈까를 생각했다.

"국회로? 국회의원치고 용기 있는 자가 남아 있었던가? 서울대로? 그들의 죽음과 희생을 더하는 이외 그들로부터 얻을 게 무엇인가? 학생들은 내가 보호해야 할 어린 세대이지 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동아일보사로? 국내 매스컴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통제받고 있으며 최근 신문에 여백으로 보도 내용이 지워져 있는 경우를 직접 봐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곳도 아무런 힘이 되어 줄 수 없으리라는 절망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외 언론으로? 까맣게 먹칠되어 국내에 배포되는 <뉴스위크> 등 외국 간행물… 미국 대사관? 서독 대사관? 과연 그들이 국제관례를 깨고 남의 나라 한 개인의 문제에 내정 간섭을 하면서까지 한국인인 우리 가족을 위해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최종선은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피를 토하듯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달려가 호소할 곳이라곤 이 넓은 천지에 단 한 곳도 없는 것이었다. 국민이 알아야 여론이 조성되고, 여론이 조성되어야 그 여론의 보호를 받으며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그들(중정) 말대로, 섣불리 경솔히 굴다간 여론이 조성되기도 전에 우리만 오욕 속에 개죽음할 뿐인 것이다. 이 나라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나와 같은 상황에서는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을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며 현실인 것이다. 아니 저명한 교수의 현실이, 정보부원의 현실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평범한 시민의 경우에서이랴!"

1947년생인 최종선 선생은 그의 형 최종길 교수가 자신의 직장인 중정에서 직장동료들에게 비참하게 맞아 죽었을 때 불과 26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20대의 젊은이인 그에게 부과된 역사의 짐, 박정희 독재정권이 부여한 고통과 한을 필자는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나는 영국에 살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 우리가 지난 한 달간 주고받은 내용의 일부를 정리하여 우리 시대 앞에 내놓을 뿐이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막내 동생이자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최종선씨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막내 동생이자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최종선씨최종선

- 1972년 중정에 수석으로 합격해 감찰실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중정에서 근무하기로 마음먹은 동기가 있었는지?
"당시, 연세대 상경대 경영학과면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을 목표로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삼성 가면 이병철, 현대 가면 정주영 같은 개인에게 종속되어 그들 개인의 부를 불려주는 도구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아예 그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한 개인, 한 기업보다는 나라에 인생을 바치는 게 더 보람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공무원 공채시험 준비만 했다. 그때 중정 해외정보관에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 중정 공채시험이 있기에 응시해서 합격하고 1년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 후 발령 난 곳이 희망했던 해외부서가 아닌 부장 직속 감찰실이어서 거기에서 첫 직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 1973년 형 최종길 교수가 자신이 근무하던 중정에 조사받으러 간 후 뜻밖에 의문사 당한 일이 평생 충격과 한으로 남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엄청난 고통과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지나고 보니 어떻게 지나왔나 모든 게 다 꿈만 같다. 형님이나 나나 민주화운동을 하다 겪은 일이라면, 적어도 한두 명이라도 우리 주변에 힘을 함께 할 동지가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어쩌면 그들과 힘을 합해 싸우는 길로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정이 형님을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죽인 것도 아니고 빨갱이로 누명 씌워 죽였으니, 빨갱이라고 누명 씌우면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는 그런 공포의 시절에, 나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후일을 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형님의 의문사 후인 1973년 10월 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에 위장 입원했다. 형님의 의문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당시 내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후일을 위해 형님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생생히 남겨 두는 것이었다. 나는 중정이 형님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워 대대적으로 보도한 뉴스를 보자마자 쇼크를 가장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중정의 감시범위 속에 남아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내가 뜻하는 글을 제한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내가 그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형님의 죽음과 그 진상, 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문과 살인에 관련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나만큼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급히 글을 남기고자 했던 것은 내게 있어 장래는, 아니 내일조차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언젠가 진상을 규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그만 첫걸음이나마 되어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썼다.

형은 일찍이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유학하고 독일 쾰른대학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법학박사가 되셨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위대한 학자, 애국자, 친구'라고 불렀던, 그리고 모교인 서울법대 정교수로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시던 의지의 지성, 집념의 학자셨다. 형은 한 잔의 차, 한 권의 책, 한 잔의 술, 한 마디의 다정한 대화 속에서도 무한한 충족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분이었다.

두 남매에게는 아버지이기 전에 다정한 친구였고, 아내에게는 어려운 남편이기보다는 투정 많은 큰 어린이였고, 강아지가 형의 어깨에 매달려 뺨을 핥던 정겨운 사람이었다. 형은 외국에 사는 누님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고는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운 착하고 착한 분이었다.

언젠가 자녀들이 자라나 '우리 아버지는 정말 조국을 배반한 역적이었으며,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을 만큼 큰 죄를 지은 반역자였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진실을 형님의 자녀 또 나아가서 사회에 올바로 알리는 것은 작은아버지로서, 고인의 피를 나눈 형제로서, 이 어두운 시대를 산 한 젊은 시민으로서의 사명이라고 믿어서 나는 형님의 의문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하루하루 하늘에 목숨 건다는 심정으로 살았다"
 
 고문수사관의 이름이 드러난 중정 부회보 제42호
고문수사관의 이름이 드러난 중정 부회보 제42호최종선
 
- 형이 의문사 당한 후에도 중정에서 무려 7년을 더 근무했는데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하루하루를 하늘에 목숨을 건다는 심정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에게 무릎 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내가 그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더 악랄하고 더 충실하게 그들에게 꼬리를 치며 비굴하게 살았을 걸로 생각하며 지레짐작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예로 들면, 그들이 형님 죽음을 보상한다며 제시했던 천문학적인 합의금 중 단 1원이라도 나와 내 가족이 그들로부터 받았다면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형님의 죽음을 돈으로 판 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은 게 될 것이지만, 나와 우리 가족은 그들로부터 형님 죽음과 관련해 단 1원 한 장 받은 게 없다.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이 아직 안 끝났다는 것인가? 우리의 싸움이 아직 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그 7년여를 그들과 나의 끝나지 않은 싸움, 언제든 때가 오기만 오면 그때 보자 하는 앙앙불락·와신상담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의 안전과 나 나름대로의 자존심과 오기를 지켜가며 버텼다.

나는 중정 안에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내 직무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민주학생, 민주인사들을 보호하며 살리는 쪽으로 일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이라는 의미는, 내가 형님 사건을 규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선, 나로서도 때가 오지 않으면 요구해 봤자 되지도 않을 일이니 때를 기다리며 기다려야 했으므로 경솔히 요구하지 않고 기다려 왔으나, 내 재직 중에 그럴만한 때가 온 적이 없으니 그들과 그 일로 부딪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때가 오기를 7년을 기다려 왔으나, 드디어 '서울의 봄'이 오고 한껏 부풀었었지만, 박정희보다 더 악랄하고 더 잔인한 전두환이 광주에서 나라의 주인 국민을 살육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민주주의를 기다릴 기력을 상실하고 절망해 중정을 걷어차고 나오게 되었다."

- 서울법대 교수이던 형님이 중정에서 억울하고 참혹하게 맞아 죽었는데 왜 그런 중정과 안 싸웠느냐는 주위 분들의 질책은 없었나?
"우선 나는 민주투사가 아니고 정보부원이다. 나는 싸우는 게 훈장이 되는 민주투사로서가 아니라, 교활한 그들 정보부원들보다 한 층 더 교활한 정보부원으로 그들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나와 내 가족을 보호했다. 솔직히 나는 싸운다는 게, 더 이상 피를 흘린다는 게 억울한 마음도 확실히 있었다. 우리가, 우리 가문이 흘려야 할 피는 차고 넘치게 흘렸다. 왜 우리만 또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인가, 자문하기도 했다.

나는 형님의 죽음에 겁먹고 덜덜 떨고 숨죽이고 엎드려 있던 소위 지성인·민주인사들이라는 자들의 위선과 비굴함을 경멸했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우리가 또 피를 흘린단 말인가? 나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뼛속까지 정보부원, 중정 최고 정예 정규과정 9기의 수석 출신 정보부원으로서, 내 방식의 길을 택했고 지금도 그 점에 후회는 없다. 그래서 중정 안에 남아 정보부원답게 형님 죽음의 진상과 증거 등을 확인하고 확보하기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결과 실제로 형님을 죽인 고문살인 수사관을 발견했다. '호랑이굴 한가운데로 들어가 살인자들을 찾아내겠다'는 마음으로 정보부로 돌아간 보름 뒤쯤인 1973년 11월 28일 감찰실 게시판에 '부회보 제42호'가 게시되었다. 이 서류 원본을 훔쳐 15년간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88년 검찰의 진상조사시 증거자료로 제출해 검찰과 정보부가 고문수사관이 누구인지 끝까지 은폐하지 못하고, 드디어 고문수사관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처벌
5국 3을 차철권 직무위반 및 직무태만 견책
5국 4갑 김상원 직무위반 및 직무태만 감봉 1월
※ 비위 내용
상기 명 직원은 간첩 용의자 최 모에 대한 수사의 주무수사관 및 보조수사관으로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제반수칙을 이행치 아니하고, 용의자의 신변관리에 소홀해 물의를 야기 시킴으로써, 직무상의 의무를 위반하고 맡은 바 직무수행을 태만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각각 처벌을 받았음. 끝
 
나는 즉시 위 회보 제42호 원본을 게시판에서 몰래 뜯어내서 곧바로 형수 집으로 직행해서 형수에게 드리고 생명을 걸고라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말씀드렸다. 다음날 출근하니 감찰실 총무과에서는 그 서류 원본이 없어졌다면서 발칵 뒤집혀 있었는데 그들은 그 대외비 문서를 떼어 갈 사람이 나 아니면 누가 더 있겠느냐는 확실한 심증은 갖고 있었으나, 이제 가까스로 설득해서 다시 출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를 자극해 봐야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형수는 이 서류를 15년간, 때로는 천장 위에 때로는 이불 속에 넣고 꿰매는 등 온갖 방법으로 감추어 오다가 15년이 지난 1988년 검찰 진상조사시 원본을 증거로 제출했던 바, 이 원본은 그 이후 검찰 기록에 증거로 첨부되어 보관 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을 겁주려는 공포 수단으로 간첩 사건 조작"
 
 최종선의 저서
최종선의 저서최종선
 
- 당시 중정에서는 왜 온건한 서울법대 학자인 최종길 교수를 그렇게 잔인하게 고문해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박정희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과 국민 모두를 겁주려는 공포의 수단으로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자신이 남로당 프락치로서 동료들을 고발하고 살아남은 전력이 있는 빨갱이인 박정희는, 자신을 의심하는 미국과 국민에게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 반공주의자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수많은 간첩 사건을 조작해 자신의 정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많은 민주세력들, 때로는 순진하고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부에 이르기까지 간첩·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박정희는 유신 1년이 지나도 유일하게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대학의 저항 불꽃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쐐기를 박고, 나아가서 학원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펴나가야 할 명분과 계기 조성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세계여론과 학생,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수렁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무엇인가 동기 조성이 필요했다.

이즈음 국민의 시선을 김대중 사건 밖으로 돌리고 뜻대로 잘 안된 이 사건으로 예기치 않은 불안한 틈을 보이게 된 공포정치의 나사를 조여야 할 명분과 계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때 바로 학원 사태의 핵인 서울법대의 교수가 정보부 안에서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양으로 죽어간 것이다."

- 지난 2001년 <산 자여 말하라: 나의 형 최종길 교수는 이렇게 죽었다>를 펴냈고 이번 달엔 <산 자여 말하라' 겨울공화국 이야기 Ⅱ, 어떤 죽음> 냈는데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유신반대 학생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로 당시 학생들과 이수성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 등이 중정에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도서관장실로 찾아온 중정 2국 서울대 담당관 김아무개에게 형님은 '학원에 기관원이 출입하고 학생 교수들을 연행해서 고문하고 핍박하는 것은 나치 히틀러의 게슈타포에서나 하는 짓'이라고 항의했다. 또 형님은 서울대 총장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 중정 차장 김치열(검사 출신)과 대공수사국장 안경상, 그리고 그 수하 고문수사관 차철권·김상원·변영철·양명율·양공숙·김종한·고병훈·정낙중·안흥용·장송록 등에 의해 형은 고문살해 당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중정은 형의 억울한 죽음에 간첩의 누명까지 씌우고 남산 중정 건물 6층 옥상에서 던져 투신자살로 위장했다. 주로 이런 내용들이 책 속에 있다. 이 책들은 이제 70 넘은 내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적 의미와 후세를 위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로 낸 것이다.

곧 내게 될 세 번째 책 <'산 자여 말하라' Ⅲ, 못다 한 이야기>는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그래서 이제까지는 차마 못 해왔던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될 것으로서 '고 최 교수 사건'의 백서라 할까, 요즈음 방송에 흔히 듣는 말로 '팩트 체크'가 주요 내용으로 포함될 것이다."

"싸울 힘도 없었고 도움받을 세력도 없어"

- 최종길 교수 가족은 왜 당시 씌워진 간첩 누명에 치를 떨면서도 한 마디의 외침도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한다면, 싸울 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도움받을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가족 간첩단이 되어 우리 가문만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고자 형님의 싸늘한 시신을 옆에 둔 채, 그들과 머리싸움을 하며 그야말로 흥정을 했다. 나는 지금 또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부장이 서명한 서면으로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세 조건을 지키기로 약속했기에 우리는 그들과의 약속에 따라, 형님의 장례식도 조용히 치렀고, <워싱턴 포스트> 돈 오보도퍼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후일을 기약했다.

첫째, 중정의 살인 행위를 은폐하고 이로 인한 저항을 억누를 목적으로 형의 죽음에 반역자로의 누명을 조작해 발표함으로써 형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 중정이 형의 명예만 지켜주면 우리는 형이 중정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숨기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노라고 침묵할 테니 날조된 누명을 씌워 발표함으로써 형을 두 번 죽게 하지 말고 중정도 침묵을 지킬 것.

둘째, 일체의 사상관계 기록에 날조된 내용을 기재하는 등 사상적 제한을 가하지 말 것. 고인이 남긴 두 자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쾰른대학이나 하버드로 유학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갈 수도 있도록, 그들이 설혹 검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의 사상적인 제한을 가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

셋째, 중정의 살인행위를 은폐할 목적으로, 형님에게 날조해 뒤집어씌우기로 한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죄 없는 형의 친지, 동료 교수, 제자들에게 형에게 가한 고문을 가해 허위증거를 조작하지 말 것.

그리고 만약 이 세 가지를 서면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형님 사체 검시에 입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세 가지 사항을 내가 주장한 이유는 그들과 계속 끌고 당기면서, 시간을 끌면서, 내심 나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도 사람의 탈을 썼다면 사람까지 죽여 놓고 한 약속이니 그 약속은 지켜 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형님사건이 일본 산케이 신문에 보도되어서 그 신문의 국내 배포를 일시 중지시켜 놨다면서 '어떻게 국가가 사람을 죽였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면서 침묵할 수 있겠는가, 운명으로 알고 참아 달라'면서 '나머지 두 개 조건은 꼭 지켜 주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1973년 10월 25일 중정차장 김치열과 대공수사국장 5국장 안경상 등이 갑자기 TV 기자회견을 열어 형님이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다 중정 7층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며 일방적으로 나와 한 약속을 깼다. 나는 이 뜻밖의 기자 회견 중 졸도를 가장해 쓰러지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응급으로 위장입원했다. 그리고 병원 지인들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동에 독방을 얻었다. 그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형님 죽음의 진상을 기록한 유언수기 초안을 작성한 후 1973년 11월 11일 퇴원했다."

"국민이 깨어나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기를"
 
 의문사 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한 최종길 교수의문사위 자료사진
 
- 오늘 대한민국은 왜 형을 고문해서 죽인 중정 수사관 차철권 등이나 광주 학살범 전두환 그리고 그 하수인들이 엄연히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가해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고 보나?
"국민이 아직 깨어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전두환의 잔당 세력들이 존재하는 한 어느 정부도 과감하게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로운 정책을 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박정희·전두환 잔당들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우매한 국민이 여전히 그들에게 표를 주는 한 그들을 척결하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강력한 법을 국회에서 입법 통과시킬 수가 없으니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 이번 4·15 총선에서 국민들이 깨어나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마지않는다."
 
- 동생이 본 형 최종길 교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형은 민법학자로서 개인의 사유 재산제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고도의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민주자본주의 체제의 기본법인 민법을 전공한 법학박사셨다. 따라서 형님의 민주주의·자본주의에 대한 소신과 신념은 그 누구보다 확고했으며, 모든 학문적, 사상적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형님이 형수와 두 자녀를 데리고 하버드에 가셨을 때 그대로 미국에 정착하라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당시 형은 '노랑머리 속에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서 법대생들의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또랑또랑한 눈망울 앞에 서는 것만이 내 소망이며 사명'이라면서 뿌리치고 귀국했다가 그렇게 잔혹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 지난 2월 안타깝게도 국회 과거사법 처리는 결국 무산되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기 국가폭력으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최종길 교수를 포함한 의문사 희생자들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조국의 국민에게 호소드리고 싶은 것은 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선택 제대로 한번 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드리고 싶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단과 드골의 주장은 단순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 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드골은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국에서는 친일파 진상규명 등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항상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국이 독일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 지도부를 숙청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 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해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에 의한 고문살인 등 반인륜범죄에 대해서는 프랑스처럼 또 독일처럼 공소시효가 없이 끝까지 추적해 엄벌할 수 있는 '반인륜범죄처벌법' 같은 것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굳건히 세우고,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건의드리고 싶다."
#최종선 #최종길 #중앙정보부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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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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