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선의 저서
최종선
- 당시 중정에서는 왜 온건한 서울법대 학자인 최종길 교수를 그렇게 잔인하게 고문해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박정희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과 국민 모두를 겁주려는 공포의 수단으로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자신이 남로당 프락치로서 동료들을 고발하고 살아남은 전력이 있는 빨갱이인 박정희는, 자신을 의심하는 미국과 국민에게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 반공주의자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수많은 간첩 사건을 조작해 자신의 정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많은 민주세력들, 때로는 순진하고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부에 이르기까지 간첩·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박정희는 유신 1년이 지나도 유일하게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대학의 저항 불꽃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쐐기를 박고, 나아가서 학원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펴나가야 할 명분과 계기 조성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세계여론과 학생,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수렁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무엇인가 동기 조성이 필요했다.
이즈음 국민의 시선을 김대중 사건 밖으로 돌리고 뜻대로 잘 안된 이 사건으로 예기치 않은 불안한 틈을 보이게 된 공포정치의 나사를 조여야 할 명분과 계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때 바로 학원 사태의 핵인 서울법대의 교수가 정보부 안에서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양으로 죽어간 것이다."
- 지난 2001년 <산 자여 말하라: 나의 형 최종길 교수는 이렇게 죽었다>를 펴냈고 이번 달엔 <산 자여 말하라' 겨울공화국 이야기 Ⅱ, 어떤 죽음> 냈는데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유신반대 학생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로 당시 학생들과 이수성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 등이 중정에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당시 도서관장실로 찾아온 중정 2국 서울대 담당관 김아무개에게 형님은 '학원에 기관원이 출입하고 학생 교수들을 연행해서 고문하고 핍박하는 것은 나치 히틀러의 게슈타포에서나 하는 짓'이라고 항의했다. 또 형님은 서울대 총장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 중정 차장 김치열(검사 출신)과 대공수사국장 안경상, 그리고 그 수하 고문수사관 차철권·김상원·변영철·양명율·양공숙·김종한·고병훈·정낙중·안흥용·장송록 등에 의해 형은 고문살해 당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중정은 형의 억울한 죽음에 간첩의 누명까지 씌우고 남산 중정 건물 6층 옥상에서 던져 투신자살로 위장했다. 주로 이런 내용들이 책 속에 있다. 이 책들은 이제 70 넘은 내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적 의미와 후세를 위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로 낸 것이다.
곧 내게 될 세 번째 책 <'산 자여 말하라' Ⅲ, 못다 한 이야기>는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그래서 이제까지는 차마 못 해왔던 모든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될 것으로서 '고 최 교수 사건'의 백서라 할까, 요즈음 방송에 흔히 듣는 말로 '팩트 체크'가 주요 내용으로 포함될 것이다."
"싸울 힘도 없었고 도움받을 세력도 없어"
- 최종길 교수 가족은 왜 당시 씌워진 간첩 누명에 치를 떨면서도 한 마디의 외침도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한다면, 싸울 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도움받을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가족 간첩단이 되어 우리 가문만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고자 형님의 싸늘한 시신을 옆에 둔 채, 그들과 머리싸움을 하며 그야말로 흥정을 했다. 나는 지금 또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부장이 서명한 서면으로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세 조건을 지키기로 약속했기에 우리는 그들과의 약속에 따라, 형님의 장례식도 조용히 치렀고, <워싱턴 포스트> 돈 오보도퍼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후일을 기약했다.
첫째, 중정의 살인 행위를 은폐하고 이로 인한 저항을 억누를 목적으로 형의 죽음에 반역자로의 누명을 조작해 발표함으로써 형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 중정이 형의 명예만 지켜주면 우리는 형이 중정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숨기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노라고 침묵할 테니 날조된 누명을 씌워 발표함으로써 형을 두 번 죽게 하지 말고 중정도 침묵을 지킬 것.
둘째, 일체의 사상관계 기록에 날조된 내용을 기재하는 등 사상적 제한을 가하지 말 것. 고인이 남긴 두 자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쾰른대학이나 하버드로 유학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갈 수도 있도록, 그들이 설혹 검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도록,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의 사상적인 제한을 가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
셋째, 중정의 살인행위를 은폐할 목적으로, 형님에게 날조해 뒤집어씌우기로 한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죄 없는 형의 친지, 동료 교수, 제자들에게 형에게 가한 고문을 가해 허위증거를 조작하지 말 것.
그리고 만약 이 세 가지를 서면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형님 사체 검시에 입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세 가지 사항을 내가 주장한 이유는 그들과 계속 끌고 당기면서, 시간을 끌면서, 내심 나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도 사람의 탈을 썼다면 사람까지 죽여 놓고 한 약속이니 그 약속은 지켜 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형님사건이 일본 산케이 신문에 보도되어서 그 신문의 국내 배포를 일시 중지시켜 놨다면서 '어떻게 국가가 사람을 죽였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면서 침묵할 수 있겠는가, 운명으로 알고 참아 달라'면서 '나머지 두 개 조건은 꼭 지켜 주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1973년 10월 25일 중정차장 김치열과 대공수사국장 5국장 안경상 등이 갑자기 TV 기자회견을 열어 형님이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다 중정 7층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며 일방적으로 나와 한 약속을 깼다. 나는 이 뜻밖의 기자 회견 중 졸도를 가장해 쓰러지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응급으로 위장입원했다. 그리고 병원 지인들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동에 독방을 얻었다. 그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형님 죽음의 진상을 기록한 유언수기 초안을 작성한 후 1973년 11월 11일 퇴원했다."
"국민이 깨어나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