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표지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다룬 책이다.
시대의창
대학에 입학한 1993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020년입니다. 반도체 소자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던 나는 2006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인문 사회 분야의 전업 작가가 되어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와 진보적 사상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나름 덕업일치를 이룬 것이죠.
직장생활을 이어나갔다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는 훨씬 여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없습니다. 통장에 꼬박꼬박 꽂히는 안정적인 수입을 잃은 대신 내가 원하는 삶, 즉 시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소중한 리뷰,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의 진지한 눈빛,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껏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상황. 내가 작가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돈보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번에 신간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마르크스 철학이라니? 먹고사는데 '철학' 따위는 필요 없다고들 합니다. 돈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웬 철학이냐는 게지요.
게다가 구닥다리 불온 인물 '마르크스'까지 덤으로 붙어 있으면 말 다했지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1980년대 사상 서적도 아니고 말이에요. 책 제목을 본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저자로서 어쨌든 관심을 가져달라고 애원하기 전에, 제 경험을 한 가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돈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웬 철학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아내와 결혼한 2009년에 함께 오스트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빈에 있는 미술사박물관에 들렀습니다. 유명 박물관인 만큼 소장품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대략 14~15세기 작품의 전시관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재가 전부 똑같더군요. 모두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예술품들 죄다 예수, 성모 마리아, 순교한 성인 등등의 모습만 담았습니다. 세상만사가 당시에도 다양했을 텐데 그 시대 서양에서는 거의 모든 예술가가 기독교에 대한 그림을 그렸던 겁니다. 별 다른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장소에서, '철학'을 느꼈습니다.
철학은 세계관(世界觀)에 관한 학문입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중세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습니다.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니 그림도 기독교 일색일 수밖에요. 십자군 전쟁도 하느님의 뜻이고, 마녀사냥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만사 오케이! 이것이 세계관, 즉 철학의 위력입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니 괜찮을까요? 현대 자본주의는 '돈' 중심 세계관이 대세입니다. 중세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돈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돈이 되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이 되지요.
회사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쩡한 노동자가 정리해고 당하고 수많은 청년 학생이 실업자로 전락합니다.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할 수 있다면 사회 전체로는 이득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실업자로 방치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중세 서양에서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당연시했듯 우리가 그런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들을 당연시한다는 점입니다.
현대사회에 대해 '철학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사회보다도 '돈'을 숭배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던 사회가 그랬듯, 맹목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