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신군부가 군부대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인권유린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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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가 발족된 것은 31년 전이다. 1989년 4월 1일의 일이다. 그런데 창립 시점이 눈길을 끌어당긴다. 4월 1일이라서가 아니라, 1989년이라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1년 10개월 뒤에 생겨났던 것이다.
일반 단체도 아니고 전국적인 대규모 관변단체가 6월 항쟁 얼마 뒤에 창설됐다는 것은 주목해볼 만한 사안이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은 1987년 12월 대선 승리로 수명을 연장하기는 했어도, 국민적인 항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집단이다. 그런 집단이 얼마 안 있어 대규모 관변단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989년 9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노태우 정권은 6월 항쟁의 여파로 인해 민중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종인 등을 비롯한 노태우 측근들이 경제민주화를 거론하며 대중의 환심을 사려 한 것도 '6월 항쟁 2탄'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위축돼 있었던 보수정권이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대규모 관변단체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이례에 가까운 일이다. 그럴 힘이 있었다면, 민중혁명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 단체의 실질적 창립 시점이 1989년이 아님을 뜻한다. 그 전부터 존재했던 단체가 이 시기에 간판을 바꾸고 '새 삶'을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는 1989년 가을의 정치권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논쟁의 무대는 국회 국정감사장이었다. 1989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바르게살기운동협 치열한 공방'은 전날 국회 내무위원회의 내무부 감사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오전 김 장관의 인사말이 끝난 뒤 첫 질의자로 나선 문정수 의원(민주)은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는 지난 4월 사회정화위원회가 해체되면서 갑자기 만들어진 후속 단체로, 이는 정부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사회정화위를 존속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성격을 규정하면서 '여야가 사회정화위를 해체토록 결의한 정신에 따라 이 단체를 당장 해체하라'고 다그쳤다."
김태호 내무장관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은 빗발쳤다. 문정수는 "예산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예산을 축내고 있으니, 바르게살기가 아니라 바르게 못 살게 하는 협의회"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평화민주당(평민당) 정균환 의원은 "국고 보조를 끊고 하루빨리 해체하라"며 다그쳤다. 평민당 이영권 의원은 "이 문제는 5공 청산이 아니라 5공 회귀의 상징적인 사안이니 장관의 결연한 의지 표명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내무장관은 처음에는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는 자발적인 단체이며 사회정화위원회와 무관하다면서 공격을 피해 나갔다. 하지만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의) 구성원·조직 등을 여러 각도에서 파악한 뒤 예산지원 문제 등의 개선 방안을 검토, 추후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추궁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박할 길이 없었던 모양이다.
반발이 그처럼 강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영권 의원의 말처럼 그것이 '제5공화국의 상징물'이나 마찬가지여서다. 전두환이 국민을 억압할 목적으로 만든 사회정화위원회가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로 둔갑한 것이라면, 전두환 시대로의 복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도 했다.
사회정화위원회는 전두환이 막후 실력자에서 대통령으로 변신한 지 2개월이 좀 안 되는 1980년 10월 28일 제정된 사회정화위원회설치령에 의해 세워졌다. 국무총리에 속한 중앙행정기관인 이 위원회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역사에 길이 남을 악행을 저질렀다. 국민들을 전두환 체제에 순응시키고자 희대의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유명한 삼청교육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청교육대는 폭력배 등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상은 무고한 국민들을 끌고 가 가혹하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고 국민들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이로 인해 '교육' 현장에서 52명이 사망하고, 후유증으로 397명이 사망하고, 정신장애 등으로 2678명이 상해를 입었다. 삼청교육이란 명분하에 1981년 1월까지 끌려간 국민만도 무려 6만 755명이다. 제5공화국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이었다.
관(官)에 사회정화위원회가 있었다면, 민(民)에는 사회정화추진협의회가 있었다. 삼청교육대를 비롯한 각종 사회정화운동은 두 기구의 합작 속에 이루어졌다.
훗날 국가안전기획부장(국정원장)이 되는 안무혁 사회정화위원장은 1981년 6월 13일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인 '안무혁 사회정화위원장 사회정화엔 안일·정체 없다'에서 "사회정화운동은 결국 민간 주도에 의한 국민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어야 성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민간운동으로서의 활성화 방안은 어떠한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모든 국민들이 진정으로 사회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현재 시·도 및 시·군·구 단위로 사회단체 대표들을 포함한 사회정화추진협의회가 구성돼 있고 그 이하 지역에는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각급 민간 정화추진 조직 간의 보다 유기적인 상호협조 체제를 보강하고 범국민적인 정화운동을 활성화할 방안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민간기구인 사회정화추진협의회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입법 조치도 있었다. 1983년 5월 21일 제정된 사회정화운동조직육성법이 그것이다. 이 법은 제2조에서 운동조직의 종류로 지역 및 직장의 정화추진협의회 등을 열거한 뒤, 제3조에서 국가·지방자치단체가 출연금과 보조금을 줄 수 있도록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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